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촘촘히 직조해낸 상하이 데카메론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세 청춘의 삶에 스며든 상하이의 수많은 사람들과 골목, 음식, 무수한 민담과 풍경의 편린들…… 시대와 공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히 묘사하며 과거와 현재를 촘촘히 직조해낸 상하이 데카메론. 『번화』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쳐온 젊은이들의 삶과 도시의 풍경을 진솔하고도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 진위청의 대표작이다. 마오둔문학상, 시내암상, 루쉰문화상 연도소설상 등을 수상했으며 왕가위 감독이 영화 및 드라마 판권을 확보해 전작 <화양연화> <2046>을 잇는 작품으로 영상화할 예정이다.
『번화』의 세 주인공 후성, 아바오, 샤오마오는 모두 상하이 출신이다. 특히 후성의 이름은 의미심장한데, ‘후성’은 상하이를 뜻하는 한자어인 ‘후沪’와 ‘생生’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사람. 소설이 상하이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후성의 형 이름은 ‘후민沪民’이다.) 이들 셋 모두 상하이 출신이긴 하지만 배경은 제각각이다. 후성은 부모님이 모두 공군 간부이며, 영국식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바오는 할아버지가 지주계급 출신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 샤오마오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상하이의 전통 골목인 농탕의 주택에 살고 있다. 세 인물이 살고 있는 주거지는 상하이의 공간 지형을 그대로 가져온 결과다. 상하이는 1949년 이전, 조계지가 분할된 상황에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때문에 상하이를 통틀어 전반적으로 통일된 계획이 부족하고 각 지역의 경제 조건이 서로 크게 달랐다. 조계지 내에는 외국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들이 많았고, 상업이 번영하였으며 고급 빌라가 위치했다. 반면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은 인구가 밀집되었고 오래된 주택이 많았다. 거리는 좁았으며 각 주택이 촘촘히 붙어 있는 구조였다.
『번화』는 후성, 아바오, 샤오마오가 살아가는 공간과 마주하는 사건들, 인물들 등 삶의 면면을 날줄로 서술한다. 영화관에 갔던 일, 우표 수집, 권법 수련, 일하는 공장에서 목도한 밀회 현장 등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이 묘사되는 가운데 수많은 거리와 골목, 건물, 음식, 과거로부터 소환된 무수한 민담과 기억의 편린 등이 등장한다. 한편 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여인들의 이야기는 씨줄이 된다. 결혼했지만 아내가 출국한 뒤 소식이 없는 후성은 메이루이와 인연을 이어가며, 아바오는 어린 시절 이웃집에 살았던 베이디에 관한 추억들을 안고 어른이 된 후에는 즈전위안을 운영하는 리리와 가까이 지낸다. 샤오마오는 농탕의 주택 아래층에 살고 있는 유부녀 인펑과 불륜을 저지르고, 이어 춘샹을 만난다. 어쩌면 이들의 삶을 이끄는 동력은 심오한 철학이나 거창한 역사 담론 따위가 아닌 순수한 욕망이다.
각 주인공들의 기억과 생활이 모자이크처럼 편편이 흩어져 서술되는 듯 보여도 이들의 삶에는 상하이의 역사가 큰 줄기로 흐른다. 태평천국의 난에서부터 시작되는 봉건왕조시대의 종언과 외세의 침략, 조계지, 문화대혁명과 그 상흔, 개혁개방 등 방향이 완전히 다른 역사와 시대의 동력들이 이 한 편의 소설 안에서 착종한다. 특히 문화대혁명은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는 대사건이다. 지주나 자본가 가정 출신의 자제들은 봉건 부패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져, 아바오 식구들은 하루아침에 공동 주택지인 양만호로 이사를 가게 되고, 노동자 가정 출신인 샤오마오는 좋은 사람으로 치켜세워진다.
평균 다섯 가구가 부엌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했고 변기통이 설치된 화장실은 두 칸뿐이었다. (중략) 아바오 가족의 새 주소는 아래층 4호실이었다. 15평방미터의 비좁은 단칸방으로 1, 2, 3, 5호실과 복도를 공유하는 형식이었다. 창밖에는 들풀이 가득 자라나 있고 실내에는 도처에 먼지와 거미줄이었다. 가족들이 짐을 담은 바구니를 들여놓는 동안 아바오 아빠는 벽돌을 하나 주워 대문 옆에 못을 박고는 딱딱한 종이에 쓴 인죄서認罪書를 내걸었다. 인죄서에는 모자를 벗고 찍은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1권 365~366쪽
『번화』에선 문화대혁명이 각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기존의 삶을 운영하던 논리를 뿌리째 뒤흔드는지, 상하이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며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해가는지까지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자유로운 형식과 서술 기법을 통해 복원한 ‘상하이’
형식 면에서 보면 소설은 두 가지 선이 병행되는 구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소설은 총 31장으로 이루어지는데, 홀수 장은 과거에 해당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짝수 장은 소설의 현재 시점 1990년대를 서술한다. 이중 28장부터 31장까지는 1990년대를 쭉 이어 그려낸다. 이 같은 구조가 ‘과거 상하이’와‘현재 상하이’라는 두 시대의 대비를 만들어낸다.
한편 서술 면에서는 말글이 이어지는 구조를 띤다. 대화를 나타내는 문장부호가 따로 없이 인물의 말이 열거된다. 이는 작가가 의도한 것으로 옛 중국문학의 서술 기법을 따른 것이다.
화본話本 형식이라는 옛날의 발자취를 현재의 바퀴에 집어넣었는데도 여전히 잘 돌아갔다. 참신하고 이채로웠다.
‘심리적 차원의 미묘함’을 포기하고 구어적인 진술과 평담한 의미를 살려 주인공들의 말과 행위를 있는 그대로 적고자 했다. 한 가지 일이 또다른 일을 물고 온다. 장산張三의 이야기가 끝나면 리쓰李四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각기 다른 어감과 행위, 복장이 각기 다른 환경을 구분하면서 각기 다른 삶을 전개한다. 문장부호들은 아주 간단하다. ‘작가의 말’에서
화본이란 송ㆍ원나라 때 유행한 구어체 소설을 칭하는 것으로, 통속적인 언어로 당시의 생활상이나 역사적인 고사를 표현해내는 형식을 띤다. 작가는 주인공의 말과 행위를 그대로 묘사하는 서사 기법을 통해 ‘상하이’ 그 자체를 그린다. 작가가 소설의 서두에서“하느님이 침묵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할 것 같다……”라고 예고한 바다. 상하이라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자유로운 형식ㆍ서술 기법을 사용해 과거와 현재가 갈마들게 하고, 인물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이 2015년 제9회 마오둔문학상을 수상하며 “『번화』의 주인공은 시대의 흐름 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도시 상하이 그 자체다”라는 평을 받은 것과 상통하는 맥락이다.
추천사
먹고사는 일, 생업 외에도, 한 도시에는 생활이 필요하다. 도시 상하이에도 상하이만의 생활, 정신, 문화의 지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번화』다. 영화감독 왕가위
중국문학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소설. 『번화』의 주인공은 시대의 흐름 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도시 상하이 그 자체다. 마오둔문학상 수상 이유
책속에서
혼자 다락방에 올라가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밤이다. <아비정전>의 피날레, 양조위梁朝偉가 말을 타고서 말을 찾는다. 늙고 암담한 영웅이 전등 불빛 아래서 지폐를 센다. 정확히 한 번 센 돈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한번 더 센다. 그러고는 포커 카드를 한 벌 꺼내 손가락으로 비벼 펼쳐놓고 자세히 들춰보다가 한 벌을 더 꺼낸다. 이어서 머리를 빗는다. 3대 7 가르마다. 거울을 보면서 단정하게 빗는다. 온몸을 곧게 세우자 뼛속까지 편안해진다. 마지막으로 불을 끈다. 불운이 극에 달하면 다시 행운이 온다. 이 삼십 초의 시간이 상하이의 맛이다. 1권 15쪽
상하이 사람들은 사랑을 거론할 때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좋아한다’는 단어를 대신 썼다. 1권 129쪽
영화관 안에 안내방송이 들렸다. 마오 주석님의 최고 지시입니다. 증산과 절약을 생활화하고 국산품을 애용합시다. 1권 314쪽
혁명 가구 하나가 이사해 들어와 전체 주민 동지들에게 중대한 시련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 떨쳐 일어나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1권 367쪽
정말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말로는 지들이 노동자계급이래. 1권 372쪽
계급의 성분에 관계없이 인간의 탐심은 다 똑같은 거야. 1권 389쪽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강아지 방귀 뀌는 소리를 하느냐고, 감정이 밥 먹여주느냐고 따져댔어요. 남녀의 감정이건 계급 감정이건 간에 전부 아무런 효과도 없고 오로지 행동만이 중요하다고 말했지요.
1권 411쪽
모든 게 사람에 대한 투쟁이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주로 서로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하나가 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지. 이게 바로 계급이라는 거야. 한 조직에서 직접 낳고 기른 같은 핏줄의 형제들이나 같은 종친의 형제들 사이에도 종종 사소한 계산 때문에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자고 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자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하지. 결국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치고받고 난투극을 벌이면서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대지. 흥, 이런 걸 듣기 좋은 말로 노선투쟁이라고 하더라고. 1권 459쪽
상하이 역사에서 대단히 신기한 한 시대의 풍경이었다. 당시에는 전 국민이 군대를 숭상했기 때문에 일종의 유행을 형성하면서 군복과 군인 이미지가 최고 직업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권 531쪽
호극의 창은 약간 처량하면서도 애교와 고통, 부드러움과 유창함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굽이굽이 상하이 역사의 마음과 운율을 토해냈다. 2권 11쪽
철저하게 끝나버린 거지. 말하자면 자산계급의 생활 습관이거나 무산계급에 장애가 되는 물건은 먼저 부수고 나서 생각하는 거야. 2권 43쪽
혁명은 이제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고기가 되어버린 것 아니야? 2권 169쪽
정치계와 비즈니스계에서 약간의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옷차림을 상당히 중시하지요. 캉 사장이 말했다. 치장은 상하이 사람들이 가장 잘하잖아요. 2권 179쪽
과거에 상하이 사람들은 “천하가 불타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넘어지는 것은 두렵다”고 말하곤 했어요. 메이루이가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캉 사장이 말했다. 가난해서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터라 집은 타버려도 상관없지만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 단벌 양복이 찢어지면 입고 나갈 옷이 없어 체면을 구기게 된다는 뜻이지요. 2권 194쪽
이 사회에 직면하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웃는 것뿐이에요. 기적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요.
2권 5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