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떨게”
수요일과 금요일 사이, 사람과 사랑 사이
세상의 모든 낙오된 이들에게 보내는 단단한 헌사
긴 기다림 끝에 도착한 천서봉 신작 시집 출간!
문학동네시인선 198번으로 천서봉 시인의 두번째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를 펴낸다. 2005년 『작가세계』를 통해 데뷔할 당시 심사평에서 “명주실처럼 매우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강한 견인력”을 지닌 시적 화법과 “온유하면서도 끈덕진 감성의 언어를 통해 입체적으로 감각화”한 의미를 “적요한 시적 울림으로 전하는 능력”이 돋보인다는 극찬을 받은 시인은 그에 걸맞은 완성도 높은 시를 꾸준히 발표하며 첫 시집 『서봉氏의 가방』을 선보였다. ‘가방’은 ‘당신’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그리움에 지친 시적 화자가 “영혼”을 “재설계”(「납골당 신축 감리일지」)하기 위해 “갈비뼈 같은 도면”(「이상 기후」)을 넣고 다니는 물건으로, 시인의 분신과 다름없는 상징물이다. 시인 본인의 이름을 내건 이채로운 첫 시집은 그렇게 “삶의 자가발전”(문학평론가 조강석, 해설)을 위해 안간힘을 내는 목소리였다.
그로부터 십이 년, 그간 치열하게 연마한 시어로 써 내려간 시 예순다섯 편을 엮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닫히지 않는 골목’ 연작시를 펼쳐 보인다. 골목은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개방된 공간”(문학평론가 이철주, 해설)으로, “없는 것들이 없어서 있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한, “시와 삶을 구분할 수 없는”(「닫히지 않는 골목」) 장소이다. 시적 화자의 소유품인 ‘가방’에서 ‘골목’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된 이러한 시선과 함께, 건축설계사로도 일하고 있는 시인만의 건축적인 상상력 또한 흥미롭게 표현된다. 유년의 기억을 길어올려 그려낸 골목에는 “재미있는 우울”을 구하러 다니는 소녀가 있고(「닫히지 않는 골목—우울 상점」), 죽은 삼촌과 이복동생이 살며(「닫히지 않는 골목—性 가족공장」), 어린 남자를 집에 들이면서 동네에 소문을 만들어내는 여자가 존재하고(「닫히지 않는 골목—붉은 집」), “고장나도 좋을 불행의 춤을” 추는 아이들이 노닌다(「닫히지 않는 골목—어린이집에서 춤을」).
첫 시집이 주로 ‘당신’으로 표상되는 애인, 아버지, 어머니, 또다른 자아와 화자 ‘나’의 이자관계에서 오는 사랑과 슬픔의 정서를 그렸다면, 이번 시집은 이미 죽었거나 사라진 존재인 ‘발목 잃은 자’들이 여전히 골목가 어느 한편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형상화한다.
“골목은 형이상학적 비상을 위해 그가 선택한 편리한 도구나 방법이 아니라, 부재 이후 그가 견뎌야 할 감각적 삶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의 심연일 따름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일은 골목의 중력에 이끌리는 유령들을 위해 부서진 말의 파편과 얼마쯤은 일그러진 음성을 미온의 담요로서 가만히 덮어주는 것뿐이라는 듯, 천서봉의 문장은 이 ‘발목 잃은 자’들의 안녕을 향해 바쳐진다.” _이철주, 해설에서
영혼에 관해 말할 때, 우린 자주 발목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발목이 사라져간 자명한 어제를 이제 상징이라 부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끓는데, 돌고 도는 목성의 얼음 띠 같은 영혼들
낯선 곳에서 잠을 깨는 일은 소멸에 가까워서 아름다웠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생각은 무너지고 나서도 다시 무너지겠죠
깊어지는 모든 것은 철학이 될 테고 자정은 비밀과 닮아갑니다
골목이 소매와 닮았습니다 점점 더 소문에 가까워지는 우리들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물은 끓어오르다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나는 당신 병이나 함께 앓았으면 했습니다
_「발목이 없는 사람」 전문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발목 잃은 자’는 “이별”(「아가미」) 후에 다가온 상실의 정서를 담은 이미지이면서, “시라는 공동체가 함께 앓고 기억하고 긍정해야 하는 타자의 존재 형식”(해설)이다. 이를테면 이는 “허기를 배우고 재난을 익”(「매일매일 매미—돌아오지 않을 아이들에게」)힌 아이들이다. 유년의 기억 속 골목가의 사람들에서 또다른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존재. 이렇게 시인은 과거의 기억에만 정주하지 않고 시인의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슬픔과 회한, 연민에 잠식되지 않고 ‘시(詩)란 무엇인가, 또한 시를 쓰는 자의 태도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사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과잉들」 「습관들」 「메모들」 등의 시에서 이러한 시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가겠습니다 _「과잉들」 부분
나는 가까스로 내 詩를 변명한다. 혹여 직관이 아닌 습관으로 지저귀고 있지 않는가 반성한다. _「습관들」 부분
詩의 이곽(耳郭)과 가장 유사한 것은 모래 아닐까,
말로 도강할 수 없는 정념, 재(災)의 문장, 그건 유령인가?
_「메모들」 부분
시인은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고 어떤 중독도 마침내 시들해”(「나비 운용법」)져버린다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편견이 없는 연대의 한 마리 나비”(「나비 운용법」)가 되고자 한다.
수요일까지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그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의뭉떨게
그렇게 우리 목요일쯤 만납시다 사랑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니었거나 그러나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마치 월요일인 것처럼, 아니 일요일의 얼굴로
흘러내린 표정이 바닥에서 말라가듯, 유통기한이 딱 목요일인 쓸쓸한 통조림처럼 우리,
_「목요일 혹은 고등어」 부분
고된 월요일과 화요일을 보내고 맞이한 수요일, 생의 한가운데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수요일”에 “우리가 살아남은 기적”을 시인은 발견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사랑이거나 사람이어도 괜찮을 목요일”에 만나, 주말의 행복을 강렬하게 예비하는 금요일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한다. 슬픔과 고통을 지나, 스러져간 모든 이들을 향해 연대의 날갯짓을 펼치는 시인의 마음.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는 “낙원을 찾아 헤매다 이렇게 늙어”가는, “수많은 문을 닫고 문에서 나”(「문을 위한 에스키스」)온 우리에게 건네는 시인의 뜨거운 안부인사이다.
두렵지만 두렵지 않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가볍게,
부디 목요일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기를.
_‘시인의 말’에서
골목의 체적이 하루가 다르게 비대해져가는 매운 계절의 끝에서 당신 없이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이별하는 의연한 표정 하나를 배운다. 그렇게 당신을 꼭 닮은 오래된 병증이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이미 지나간 계절이 여러 번 온 힘을 다해 다시 지나간다.
_이철주, 해설에서
◎천서봉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안녕하세요, 십이 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출간하셨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시를 잊고 살았던 건 아닌데 세월이 참 빠릅니다. 요즘 다시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 그게 동력이 된 것 같아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2.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는 독특하면서도 울림 있는 제목입니다.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목요일 혹은 고등어’라는 시에 들어 있는 시구의 일부입니다. 절대적인 시간성 속에서 결국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시간의 상대성이 발현된다고 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운 날을 기다려 만나기보다는 우리가 만나서 아름다운 날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Q3. ‘닫히지 않는 골목’ 연작시들이 이 시집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회상과 상상을 통해 그려낸 골목의 지도가 무척 인상적인데요, 건축설계사로 일하고 있는 시인님의 이력도 떠오릅니다. 이 시들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시간은 과거로 넘어가면서 변형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기억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지워지면서 어떤 풍크툼을 남기죠. 다 지워지기 전에 그것들을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모든 건축가들은 골목을 좋아할 거예요. (웃음) 아마도요.
Q4. 2부의 주요한 시들인 「후생들」 「과잉들」 「습관들」 「메모들」 등의 시를 읽으면, 시인님의 치열한 시적 정신이 느껴집니다. 상실의 정서를 담고 있는 「발목이 없는 사람」도 기억에 남고요. 이 시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
수많은 타자 속에서 외롭거나 괴롭던 시절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결핍이나 상실이 나를 증명해주곤 하니까요. 그래도 무언가 쓰거나 뱉고 나면 슬며시 다시 희망 같은 것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Q5. 마지막으로,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를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안녕하세요. 시와 건축설계를 병행하고 있는 천서봉입니다. 늘 목요일 같은 초록의 햇살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저는 부끄럼 많은 분홍으로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