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 이브 본푸아가
50여 년간 읽고 쓴 랭보에 관한 기념비적인 평문 모음집
이 책은 1961년~2008년 사이에 오직 ‘아르튀르 랭보(1854~1891)’만을 문제삼아 쓴 이브 본푸아(1923~2016)의 평문 모음집이다. 50여 년간 랭보 시를 거듭 읽어온 프랑스 시의 역사에서 중요한 또 한 명의 시인 본푸아. 생전에 문예학자이자 영미문학 번역가로서도 명성을 떨친 그는 자기만의 시세계를 독창적으로 개척한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하고 노벨상 후보로도 심심찮게 언급되어온, 랭보만큼이나 문학사에 각인된 또하나의 위대한 시인이다. 그가 출판한 100여 권의 책은 30여 개의 언어로 소개되었으며, 한국에도 주요 시집과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만년에 이 평문을 묶어내면서, 저자는 오늘날 랭보가, 이 시인의 목소리가 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감동어린 문장으로 풀어낸다. 어떻게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듭 랭보를 읽을 수 있고 다시 쓸 수 있는가? 시인이 한 시인을 이토록 극진히 자기 삶의 동반자로 삼아 글을 써낼 수 있는가? 이 책의 설득력과 진중성은 바로 이 질문에서 이미 확보되어 있다.
본푸아는 애초에 이 책제목을 자신이 따라 읽어온 시인의 정신에 기대어 ‘희망과 명철함Espérance et lucidité’이라고 지을까도 했다고 밝히면서 1950년대부터 랭보에 대한 탐색을 이어온 이 글묶음을 두고 “시인에 대한 나의 애정을 기록한 일기”에 가깝다고 고백한다. 랭보 독자나 연구자 사이에서 필수적인 글로 언급되어온 1961년 글 「랭보」를 비롯해, 1970년대를 거쳐 2000년까지 여러 책이나 학회집에 실은 평문들, 콜레주드프랑스나 옥스퍼드대 또는 오르세미술관 등에서 행한 강연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 실은 서문 등이 여기 묶여 있다. 랭보에 대한 전기와 시작품에 대한 해설을 오가며, 시인 본푸아는 랭보에 대한 독해를 이렇게 갈무리한다. “삶의 이 시점, 말하자면 꽤 만년에 접어든 지금, 랭보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조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에 대해, 사회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삶으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야 하는가... 이에 대한 계시로서 랭보만큼 내게 중요한 시인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가 랭보로부터 얻어낸 배움, 그 수확의 만찬이 곧 이 기념비적인 책이다. 아울러 고 황현산 선생의 제자이자 랭보 연구자인 위효정 번역가는 정확하고 성실하게 전문을 번역하고 랭보 시 중 필수적으로 본푸아가 언급하고 있는 시와 해제를 부록으로 넣어 한국어판의 완성도를 높였다.
랭보를 통해 본푸아의 시학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이자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세계에 대한 훌륭한 스케치
본푸아는 이 책에서 랭보와 연결지어 보들레르, 말라르메, 베를렌 등도 주요하게 스케치한다. 랭보가 자신보다 선배인 보들레르를 가리켜 “너무 예술가적”이긴 하나 “최초의 견자” “시인들의 왕” “진정한 신”으로 불렀듯, 본푸아는 1860년대 중반에서 1870년대까지 프랑스 시의 전성기를 누비던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랭보 시학의 차이를 함께 살핀다. 이를테면 보들레르와 랭보가 시적 창조의 근간이 되는 ‘양면성’을, 또 그들 시의 본질을 꿰뚫는 희망과 진실에 대한 요구, 명철함에 대한 요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하면서도, 보들레르가 지고의 미에 대한 신앙을 지닌 탓에 이웃하며 살아나가는 이들과 이편에 대한 ‘경멸’이 있는 반면, 랭보는 구속과 강압에서 벗어나 이들과 더불어 해방된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는 상상을 보여준다며 둘을 대비시킨다. 또 전기적 일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베를렌과의 관계에서도 “범람하는 관능”과 “감각주의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베를렌과 달리, 랭보는 투시자로서 “모든 감각의 조리 있는 착란”을 통해 여기에서의 집단적 변혁을 통한 “미지”를 꿈꾼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전기적 일화 중에서 랭보가 “어둠의 입”이라 부르는 그의 어머니 비탈리 퀴프와의 관계를 다룬 「랭보 부인」에서는 어린 시절 경험한 폭력과 사랑의 좌절이 어떻게 그의 “반항의 원인인 동시에 시적 소명의 원천”이 되는지,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의 장소이자 증거”가 되는지를 심도 있게 보여준다.
또한 파리코뮌이 안긴 좌절, 기독교 유럽과 관계적 현실의 비일관성 속에서도, 꿋꿋하게 비참을 넘어 절대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을 성찰해나간 “자유의 불사조, 타버린 소망들을 제 육체로 삼는 새” 랭보의 시적 기획이 지닌 급진성을 짚어내면서, 본푸아는 랭보와 더불어 빛나는 경구 같은 문장들로 자신의 시학을 보다 또렷하게 표명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남기고자 하는 이들”과 “삶을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을 구분해내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간 그를 두고 본푸아는 이렇게 말한다. “랭보와 함께 우리는 시 역시 ‘삶을 바꿀’ 하나의 방편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누가 알겠는가, 심지어 가장 중요한 방편이 아닐지.” 이 말은 곧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수행한 랭보의 독해가, 시인의 시 쓰기가, 이 글들 자체가 곧 이를 노정하고 있음을 알린다.
시인의 요청: 오늘날 랭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19세기를 풍미했고 오늘날까지 책, 영화, 회화 등 여러 방면에서 모더니즘의 시적 모험에 돛을 올린 시인으로서 회자되건, 베를렌과의 각별한 애정관계를 통해서이건, 또 시와 급작스레 단절하고 에티오피아로 넘어가 무역상으로 살다 종양으로 다리 절단 후 암으로 죽어간 말년의 급류 같은 삶을 통해서이건, 랭보는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하나다. 이브 본푸아는 그간 잘못 읽히거나 그 일면만 부각되어온 랭보를 넘어서서 “자기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마다 그와 마주하며 “진정한 삶”을 향해, 일상세계를 가로지르는 “사회 혁명”을 향한 연대이자 “사랑의 재발명”을 호소하는 긴박한 목소리로서 랭보를 읽어나간다. 랭보의 시작품을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너와 나, 우리의 삶을 생생히 감각하게 하고 이를 바꿔나가도록 현실에 실존을 기입하고 사회에 직접 개입하도록 하는 현존하는 목소리로 보기에, 그가 읽어내는 랭보는 커다란 울림을 준다. 완고한 개념의 세계에 말의 무질서를 풀어놓고 속박과 실패로 뒤덮인 현실의 진창에서 진정 “삶을 바꿔야 한다”고 부르짖는 여전히 젊디젊은 이 시인의 정신을 따르며, 그는 오늘날 왜 그의 시가,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한 문단 한 문단 신중한 경탄 속에서 그를 호명하고 있다. “위대한 시인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그 시인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닐 수도 있을 진지함을 향해 얼마간이라도 우리를 이끌고 가주기를, 그의 급진성에 기대하는 일이다... 직접 요청하는 목소리, 단언하고 물론 착각도 하는 목소리, 그러나 다시 시작하는 목소리, 다시 시작함으로써 살아가는 목소리... 랭보를 기억하자. 우리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그가 필요하다.”(이브 본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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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맛보기】
한 명의 위대한 시인을 읽는다는 것이 문학 애호가로서 그 시인을 위대하다고 결정 내리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거만함이다. 아니, 그것은 그 시인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닐 수도 있을 진지함을 향해 얼마간이라도 우리를 이끌고 가주기를, 그의 급진성에 기대하는 일이다. (11~12쪽)
한편에는 실존이 나눔일 수 있으며 따라서 삶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희망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희망이 빠져드는 잇따른 환상들을 파괴하는, 그러나 동시에 희망이 보다 깊어지고 뚜렷해질 수 있게, 말하자면 갖가지 시도가 완전히 무너져도 굴하지 않는 순결한 희망이 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명철함이 있다. (12~13쪽)
친구 여러분, 삶의 이 시점, 말하자면 꽤 만년에 접어든 지금, 랭보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조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동과 더불어, 약간의 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또한 느낍니다. 1950년대 이후로 나는 몇 차례에 걸쳐 이 위대한 시인 앞에 멈춰 섰고, 그에 대해 여러 에세이를 썼으며 그때마다 시에 대해, 사회에 대해, 또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해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17쪽)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단어 속에서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말라르메가 “모든 꽃다발에 부재하는 꽃송이”를 상기할 때, 이는 이데아에, 지적 원형에 우리의 유한성과 죽음을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보들레르가 “백조”를 명명할 때, 이는 모든 것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하나의 진정한 현존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랭보는 저 구원자 단어들로 무장했다. 다만 랭보를 사로잡은 것은 이데아나 존재의 현존이 아니라 감관의 표상들 너머, 언제나 그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언제나 감추어져 있는 저 존재의 실질적이고 찬란하며 운행중에 있는 즉자였다.(163쪽)
랭보의 위대함으로 남을 점은 자기 세기와 자기 장소에서 누릴 수 있었을 일말의 자유를 거부하고 인간의 소외를 증언하며 그들을 행복 없는 동의에서 불러내 절대와의 비극적 대면으로 이끌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심과 그 꿋꿋함이야말로 그의 시를 우리의 언어 역사상 가장 해방적인 시로, 따라서 아름다운 시 중 하나로 만든 것이다.(311쪽)
미래의 시인이 근원을 포착하는 것은, 근원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해 벌써 근원이 꺼져드는 것이 보이는 바로 그 각도에서다. 그의 기억 행위가 이미 하나의 기투企投이며, 현 역사의 암흑을 가로질러 앞을 향한다.(329쪽)
이 양면성이란 무엇인가? 시적 창조에 내재한 이 중대한 논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시인들의 생각 속에서 미, 하나의 진실이리라고 여겨지는 미에 대한 욕구와 동정하는 능력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이다. 이 동정의 능력을 통해 다른 존재들이 살아내야 하는 고통 혹은 비참을 보고 그 존재들에 애착을 가지며, 이때에는 아름다움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보들레르는 이 논쟁을 부각시킨 최초의 시인이다.(459~460쪽)
시의 과업은 그 “이중의 청원”을 인지하고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정말로 아는 일이라는 것, 글쓰기가 제공하는 자유를 누리건 누리지 못하건, 단어들이 걸려드는 망상을 일소하리라는 시의 능력에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4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