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독파하는 사상의 힘, 사색의 즐거움!
플라톤, 셰익스피어, 공자, 아우구스티누스, 보들레르, 메를로퐁티 ―
‘헤겔 번역혁명’으로 이름높은 철학자 하세가와 히로시의 독서에세이
인문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책은 헤겔의 저작에 대한 획기적인 번역으로 이름높은 일본의 철학자 하세가와 히로시가 쓴 독서에세이다. 안정된 사고의 리듬, 격조 있는 문장, 잔잔한 통찰로 엮은 철학고전 읽기의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15권의 고전을 인간, 사색, 사회, 신앙, 아름다움의 5개 카테고리로 구분해 읽어나가면서 느낀 바를 기존 번역본을 인용하며 소개한다. 이 책에서 다룬 고전들은 희랍 고전에서 20세기 프랑스 철학서는 물론이고 사회과학서나 논어, 문학작품 등에 걸쳐 있다. 하나같이 읽어서 재미있고 그 느낌을 글로 써서 더욱 즐거운 책들이다. 지은이는 이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도 교과서적인 소개보다는 비판적인 태도로 자기 나름의 사색을 심화시키는 소재로 활용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지은이와 함께 생각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에 독자 나름의 답을 떠올려보는 기분이 들고, 그만큼 즐거운 사색의 시간이 된다.
셰익스피어 『리어 왕』, 데카르트 『방법서설』, 플라톤 『향연』, 공자 『논어』, 루소『사회계약론』,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아우구스티누스 『고백』, 파스칼 『팡세』, 보들레르 『악의 꽃』, 메를로퐁티 『눈과 정신』 등이 지은이가 엄선한 고전들이다.
근대적 인간관을 제시한 셰익스피어 『리어 왕』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감회를 남긴다. 사회 속에서 함께 살며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에게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 유럽의 기본적 인간관이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극은 근대 여명기에 근대적 인간관의 풍부함을 실물로 입증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리어 왕』은 하나의 물결이 또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끔찍한 고통이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는 인간세의 변화무쌍함을 다룬 비극이다. 줄거리가 전개되는 면만 보더라도 이만큼 빈틈없이 꽉 찬 내용을 담은 작품도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존재는 브리튼 왕국을 지배하는 늙은 왕 리어. 입에 발린 소리로 알랑거리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권력자가 주변의 상황을 냉정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다만 리어의 경우는 보통의 범위를 넘어서며 비현실적인 감마저 풍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여곡절 끝에 애정 넘치는 리어와 주변 사람들이 나누는 마음의 교류에서는 광기마저 감싸안는 두터운 정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지은이 하세가와는 인간이 본래 지닌 마음의 풍요로움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무언가가 거기에는 있다면서, ‘보통사람들의 별로 색다를 것 없는 생활 속에 살아갈 만한 가치가 숨어 있다’고 보는 셰익스피어의 인생관에 주목한다.
살아갈 용기와 생각할 용기를 주는 데카르트 『방법서설』
이 책에서 지은이 하세가와는 『방법서설』이야말로 사람에게 살아갈 용기와 생각할 용기를 주는 상쾌한 책이라고 잘라 말한다. 데카르트는 넓고 깊게 학문에 익숙했고, 다양한 사람과 사귀었으며, 인간사회를 가까이에서 또 멀리에서 관찰했고, 자신의 생각이 정말로 옳은지 계속해서 물었던 철학자다. 그의 생각의 토대는 인간을 관찰해서 얻은,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는 양식·이성·판단력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교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양식과 이성과 판단력에서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사람으로서, 보통사람들과 함께 지적知的으로 살기를 바랐고, 그런 삶의 방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그렇게 사는 의의는 무엇인지를 밝히려 ??방법서설??을 썼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예감에 이끌려 자기를 탐구했고, 거기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듯 확실한 것이 바로 서양근대철학의 개막을 알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라는 명제였으니, 그에게 미더운 것은 자기였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 자기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 이 책의 주요 대목
2년쯤 전이었다. 철학 고전을 20권가량 고르고, 그 책이 왜 재미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교양서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중에, 분야는 철학으로 좁게 한정하지 않아도 되고 문학이나 음악을 다룬 책을 철학적으로 논해도 괜찮다고 했다. (…) 먼저 해야 할 일은 읽어서 재미있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도 즐거울 법한 책을 20권쯤 고르는 일이었다. 그 일은 어렵지 않았다. 책 리스트를 다시 살펴보니,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지금 읽고 싶은, 내 이웃들이 잡아도 흥미로워할 법한 책들이었다. 그렇다면 쓰는 순서도 그때그때 해당 책에 대해 쓰고 싶다는 기분이 들면 그에 따라 쓰기로 했다. (6~7쪽)
루소가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이성적인 사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자유의 원리성이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사람과 사람의 참된 관계는 생겨나지 않는다. 자유가 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강제로라도 그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계약론』은 ‘자유가 기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고찰해보려는 책이다. (112쪽)
어떤 의견이 진리이든 오류든, 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이익이라고 밀은 말한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사회생활을 둘러싼 생각이나 의견은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절대적인 진리 따위는 찾을 수 없다’는, 상대적으로 세계를 보는 눈이다. 그렇다면 어느 의견에도 유일무이한 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어떤 의견이든 거리낌없이 제시하고, 서로 진위를 다투면 된다. 그 가운데 어떤 의견이 찬동하는 이를 많이 얻어 진리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언젠가 다시 진리가 아니라고 판명날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언제까지나 계속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끊임없이 비판당하고 음미되고 새로운 진리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다. (125쪽)
현실세계의 진상에 바싹 다가가려 한 근대소설은 사회와 개인의 부정적인 면, 어두운 부분, 악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입체적인 소설세계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에서는 악·악인·악행이 근원적·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는 사실을 에누리없이 인정할 것이다. 악이 광채를 발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다. (143쪽)
파스칼의 시대는 더이상 너나 할 것 없이 순진하고 무심하게 신을 믿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신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사회에 확산되고 있던 시대였다. 신이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이미지는 시대감각에 맞지 않았다. 맞지 않더라도, 영광에 가득 찬 당당한 신의 이미지를 계속 간직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파스칼의 입장은 아니었다. 신을 믿으면서, 시대와 더불어 살고, 시대의 내부로 깊이 파고들어 신의 이미지를 뽑아내려는 것이 파스칼의 입장이었다. 그 입장에 설 때, 신은 얼마나 어색해 보이든 간에 ‘부분적으로 숨어 있고 부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신이어야 했다. 파스칼과 시대의 어찌할 도리없는 관계에서 탄생한 것, 그것이 ‘숨어 있는 신’이었다. (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