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에 실린 일곱 단편은 1980년부터 1982년 사이에 발표된 것으로, 모두 재능 있는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삼십대 초반 하루키의 실험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유명한 곡이나 배우의 이름에서 제목을 빌려왔을 뿐 그로부터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가 하면(「중국행 슬로보트」 「뉴욕 탄광의 비극」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녹음을 위해 마이크에 대고 늘어놓는 말소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일종의 ‘카세트테이프 소설’을 쓰기도 한다(「캥거루 통신」). 소설 창작이라는 행위를 소설 자체로 검증해보려는 시도 역시 돋보인다(「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사소해 보이는 모티프에서 출발해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고 써내려간 이 작품들에서 젊은 작가만의 분방함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이 소설집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천착해온 주제나 문체 등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나같이 기묘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기억 속 세 중국인, 아무도 모르는 사이 등에 달라붙은 가난한 아주머니, 십 년째 태풍이 닥칠 때마다 동물원에 가는 남자……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이런 존재들을 통해 작가는 특유의 투명하고 감각적인 문장으로 자아의 고독과 상실감, 세계와의 거리감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양 사나이와 양 박사, 일각수 등 다른 작품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요소들을 만나는 반가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구축해온 세계의 씨앗이 이 소설집에서 발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 하면 선 굵은 장편소설들을 먼저 떠올리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나 트루먼 커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등 뛰어난 단편을 써내는 작가들의 팬을 자처하며 직접 번역까지 할 만큼 단편소설을 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정은 각별하다.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시기의 단편을 엮은 이번 소설집은 그의 오랜 팬들에게는 물론, 이제 하루키 월드에 들어서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어디로도 갈 수 있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존재들의 세계!
「중국행 슬로보트」
‘맨 처음 중국인을 만난 게 언제였을까?’ 이 고고학적 의문을 출발점으로 나는 그때까지 만난 중국인의 기억을 더듬는다. 모의고사 시험장에 감독관으로 들어온 교사, 나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해 단 한 번의 데이트 이후 영영 만나지 못한 여대생,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 년쯤 뒤 우연히 재회한, 백과사전 외판원이 되어 있는 고등학교 동창. 하나같이 기묘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기억 속 이 세 중국인을 떠올리는 동시에 도쿄의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상념에 젖는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흠잡을 데 없이 화창한 7월의 일요일 오후, 나는 가난한 친척 아주머니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친척 중 가난한 아주머니라고는 한 명도 없는 내가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어느 순간 등뒤에 가난한 아주머니가 달라붙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뉴욕 탄광의 비극」
십 년째 태풍이 닥칠 때마다 동물원에 가는 남자가 있다. 그 습관을 제외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그 친구에게 나는 장례식에 갈 때마다 양복과 넥타이와 가죽구두를 빌린다. 내가 스물여덟 살이던, 유독 장례식이 많았던 해의 일이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날, 한 파티에서 마주친 한 여자로부터 오 년 전 그녀가 나와 꼭 닮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듣는다.
「캥거루 통신」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며 고객의 불만 신고에 응대하는 나. 일주일 전 브람스와 말러를 헷갈려 레코드를 잘못 샀다는 여자에게 상품 교환을 거절하는 답장을 쓰려다 몇 번이나 실패하고 단념했지만, 오늘 아침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캥거루 통신’이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보내기로.
「오후의 마지막 잔디」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나는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애인과 떠날 여행 자금을 모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그녀로부터 헤어지자는 편지가 도착하고, 돈을 쓸 일이 없어진 나는 결국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기로 한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마침내 마지막 잔디를 깎으러 길을 떠난다.
「땅속 그녀의 작은 개」
비수기의 한적한 리조트호텔. 끈질기게 내리는 비 탓에 며칠째 실내에만 갇혀 있던 나는 같은 처지의 또다른 투숙객과 얘기를 나누게 된다. 장난삼아 그 여자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맞혀보던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일순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기억 하나를 풀어내는데……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시드니에서 가장 시들한 거리 그린 스트리트에 사무소를 차린 나는 재미있는 사건만 받는 사립탐정이다. 낮잠을 자거나 맥주를 마시며 피자 가게 웨이트리스 찰리와 노닥거릴 뿐이던 내게 어느 날 양 인형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찾아온다. 스스로를 양 사나이라고 소개한 그는 내게 사흘 전 양 박사가 뜯어간 오른쪽 귀를 찾아줄 것을 부탁한다.
▶ 본문에서
“됐어.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고.”
그녀가 말하는 장소가 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암흑의 우주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바윗덩어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국행 슬로보트」
원래의 나 자신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이제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원래의 나 자신을 꼭 닮은 또다른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글자가 지워진 표지판처럼 나는 완벽하게 외톨이였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
어둠이 조금씩 현실을 용해해갔다. 모든 것이 한참 옛날, 어딘가 머나먼 세계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혹은 모든 것이 한참 나중에, 어딘가 머나먼 세계에서 일어날 일인 것도 같았다.
다들 최대한 숨을 쉬지 마, 남은 공기가 얼마 안 돼. 「뉴욕 탄광의 비극」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캥거루 통신」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
어떤 경우에 비는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오랫동안 계속 비를 보고 있으면 비 쪽이 현실인지 내 쪽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비에는 그런 작용이 있다. 「땅속 그녀의 작은 개」
꿈속에서 나는 우물물을 긷고 있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올려 큼직한 대야에 부었다. 대야가 가득차자 악어가 다가와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대야가 다시 차자 이번에는 다른 악어가 다가와 그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 옮긴이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옮긴 책으로 『1Q84』 『일식』 『장송』 『센티멘털』 『소설 읽는 방법』 『가면의 고백』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장미』 『철도원』 『칼에 지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장미 도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붉은 손가락』 『남쪽으로 튀어!』 『유성의 인연』 등이 있다. 『일식』으로 2005년 일본 고단샤가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