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의 품격과 시대의 눈물을 담은 역사 동화
『검은 바다』『무덤 속의 그림』『에네껜 아이들』 등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순간들을 뚝심 있게 조명하며 강렬하면서도 꼼꼼한 조사가 바탕이 된 풍성한 작품들을 써 온 문영숙 작가의 신작 동화 『벽란도의 비밀 청자』가 나왔다. 작가는 이번엔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청자로 유명했던 전라도 강진과, 고려 중기에 벌써 세계적인 무역이 이뤄졌던 벽란도의 한복판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송나라 태평 노인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책『수중금』을 보면 천하제일의 것들 중 하나로 고려청자의 ‘비색’을 꼽았을 정도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신비롭고 품격 있는 것이었다. 주인공 도경이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고려청자의 찬란했던 예술적 경지와 세계적인 위상,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도공들의 열정과 헌신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문영숙 작가는 예리한 시선으로 그 시대의 그늘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었다. 아무리 솜씨가 좋고 성실하게 청자를 구워도 백정 계급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도공들의 궁핍한 삶, 지배 계급과 세력가들의 부조리함, 벽란도의 화려한 불빛 뒤에 감춰져 있는 검은 거래 등 그 시대의 기쁨과 눈물이 마치 오늘의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도공의 아이 도경이, 우여곡절 끝에 벽란도로 가다
고려시대에 전라남도 강진 일대는 청자 제작의 요지였다. 『벽란도의 비밀 청자』의 배경이 되는 당전 마을은 그중에서도 궁궐에 진상하는 청자를 만드는 곳이다. 열세 살 소년 도경이는 대대로 뛰어난 청자를 구워 온 도공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고되게 일을 하고도 끼니 걱정을 하는 처지가 답답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 년 전 엄마를 도우려 자신이 한 일 때문에 가족이 큰 어려움을 겪은 뒤로는 자꾸만 죄책감이 들고 숨고만 싶다. 도경이는 바람을 쐬기 위해 갔던 포구에서 수리 중이던 물품 운반선에 우연히 타게 된다. 때마침 배에서 심부름할 아이가 새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동안 당전 마을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던 차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의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도경이는 실수로 배에 실려 있는 귀한 청자 향로를 깨뜨리고 만다. 입장이 난처해진 선주는 도경이를 찾으러 온 할아버지에게, 도경이가 깬 정도로 좋은 향로를 만들어 내라며 그 전까진 도경이를 붙잡아 두겠다고 못 박는다. 결국 도경이는 볼모로 잡혀, 도경이가 깬 향로의 주인인 벽란도 송방에게 끌려간다.
스케일 큰 상상력과 빠른 속도감이 돋보이는 동화
작품은 도경이가 벽란도에 도착한 뒤 본격적으로 속도감이 붙는다. 도경이는 처음엔 할아버지가 청자를 실어 보내기로 약속한 일 년의 시간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점점 복잡해져 간다. 불호령을 할 줄 알았던 송방은 도경이가 청자를 보는 눈이 있다는 걸 알고는 상점 일을 돕게 한다. 도경이는 만든 이의 손을 떠난 후로의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강진 청자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는다. 동시에 전량 궁궐에 들어가는 줄로만 알았던 강진 청자가 암암리에 거래되며 엉뚱한 이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도경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바탕에는 당전 마을의 감도관과 벽란도의 감창사, 송방 사이의 은밀한 거래라는 큰 그림이 있다는 걸 알고 긴장한다.
그런데 청자를 받기로 약속한 날이 지나도록 할아버지로부터는 소식이 없다. 송방은 속셈을 계속 바꿔 가며 도경이를 압박하는데……. 『벽란도의 비밀 청자』는 할아버지와 자신을 지키려는 도경이의 분투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도경이가 송방의 계략에 맞서 정황을 추리하고 결단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이 박진감 있게 그려져 있다. 현실에 좀처럼 마음을 붙일 수 없었던 한 소년이 험난한 여정을 겪으며 어엿한 도공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찡한 감동을 준다.
서사의 재미와 역사적 의미를 두루 갖추다
작가는 청자에 대한 것 이외에도 해상 수송이 발달했던 고려의 조운길에 대한 묘사, 개경에서 열린 팔관회 장면 등 다양한 시대적 풍경을 담으며 읽는 재미를 보태고 있다. 게다가 도경이의 모험이 고려청자가 명맥을 잇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는 상상력도 유쾌하다.
청자는 불과 흙으로 빚어낸 마법이라고 한다. 그 속엔 도공들의 뜨거운 눈물과 회한이 서려 있다. 그래서 『벽란도의 비밀 청자』를 읽고 나면 고려청자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삶의 핍진함을 뛰어넘어 청자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도공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작가는 글을 쓰며 아라비아인, 송나라인 등 여러 나라의 배가 들고났던 그 시절 벽란도의 항구를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어찌 보면 고려청자야말로 최초의 ‘한류’는 아니었을까? 작가의 믿음직스러운 안내를 따라 당전 마을과 벽란도를 누비는 동안, 박제되어 있는 역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만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홍선주 화가의 치밀하면서도 고운 그림이 책을 빛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