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절반, 나는 엄마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나머지 절반, 나는 엄마가 죽어주기를 바랐다.
당신은 어머니를 미워한 적이 있는가? 혹은 어머니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여기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한 어머니가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감당할 수가 없어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을 떠도는 종군기자로 살아간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명한 종군기자로서 아들은 승승장구하지만, 그가 레바논에서 이라크까지, 무차별적인 테러와 거대한 세계의 비극이 있는 위험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실은 어머니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를 잊고 싶다. 몸과 영혼이 완전히 무너져 가족들의 삶마저 잡아먹으려 하는 추하고 늙은 어머니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다. 사람이 죽고 포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 그의 가슴속에 짙게 드리우고 있던 어머니의 그림자도 조금 옅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 그리고 지독한 상실감과 뼈아픈 후회였다. 남은 것은 아직 엄마 냄새가 가시지 않은 집과 유품들뿐. 아들은 유난히 요리를 잘했던 어머니의 텅 빈 부엌에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다.
“엄마, 어디 있어요? 제발 돌아와주세요……”
죽어주길 바랐던 엄마가 정말로 죽었다
어떻게 우리가 엄마의 죽음을 견딜 수 있을까?
어린 시절, 한없이 자애롭고 아름답던 그의 어머니는 늘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엄마는 자석처럼 가족들을 부엌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유년 시절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릴 때면 늘 엄마의 요리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다정하고 친절하던 엄마가 점차 변해갔다.
“엄마는 왜 그렇게 위스키를 많이 마셔요?”
“그냥 가끔 슬퍼져서 그래.” 엄마가 말했다. “술은 슬픔을 멀리 달아나게 해주거든.” (174쪽)
어머니는 아들이 그토록 행복해했던 애틋한 추억들도 다 떠올리지 못했고, 더이상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다. 남편의 외도와 이혼을 거치면서 어머니는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갔다. 병원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지 못했고 술에 절어 비정상적인 언사를 내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주변에서 하나둘 떠나갔다. 아들은 어머니와 싸우는 일이 잦았다. 사랑했으나 알코올중독에다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엄마와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던 아들은 가출과 일탈을 일삼더니 결국은 엄마를 혼자 두고 아버지와 살겠다고 떠났다.
“전 차라리 엄마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는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고통스러워하기만 해요. 엄마에겐 산다는 게 의미가 없어요.” (14쪽)
아들은 그런 엄마로부터 도망치듯 전쟁터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죽음에 조금은 무뎌진 종군기자에게도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의 죽음은 믿기지 않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아들은 지독한 상실감과 뼈아픈 후회에 휩싸였다.
엄마를 지독히 미워했던 아들, 엄마의 부활을 꿈꾸며 추억을 요리하다
“이 세상 어떤 부엌이든,
나는 부엌에만 있으면
새삼 내게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곤 했다.”
엄마의 장례식 후, 아들은 더할 수 없는 상실감에 하루하루 괴로워한다. 어떻게 하면 엄마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아들은 유품을 정리하다 엄마의 낡은 요리노트를 하나 발견한다. 그 노트에는 엄마가 가족을 위해 준비했던 요리들의 레시피가 육필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바로 그 순간, 아들은 엄마와 다시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엄마를 되찾아올 한 가지 방도를 찾았다. 당장 내 집 부엌으로 달려가서 엄마의 요리들을 직접 만들어보는 것. 엄마의 돼지갈비, 초콜릿 크리스피, 딸기아이스크림…… 어쩌면 그 음식들이 내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내가 잊고만 싶어했던 과거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어줄지 모른다. (66쪽)
아들은 엄마의 부엌에서 엄마의 요리노트에 적힌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 만들지는 못한다. 누군가를 위해 하나의 완성된 요리를 만든다는 것, 요리노트가 요구하는 재료와 레시피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요리하는 과정을 즐기지 못한 것이다. 그 무렵 아들은 아기를 간절히 원했던 아내 퍼닐라와 시험관 시술을 받는다. 아들은 아내와 아기를 위해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들을 만든다. 엄마의 레시피대로 요리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면서, 아들은 엄마가 자신에게 음식을 해주며 느꼈을 뿌듯함과 숭고함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조금씩 엄마가 평소에 했던 요리와 관련된 말의 속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은 아들을 힘들게 했던 엄마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자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엄마의 과거에 대한 일종의 거부반응이 있었다. 엄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다시 생각한다. 엄마의 증세는 의사의 진단처럼 정말 단순히 알코올중독에 지나지 않았을까. 내가 모르고 있던 어떤 중요한 부분이 있진 않았을까. 아들은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엄마의 주변인을 인터뷰해간다. 친척과 지인들의 증언, 누나의 일기장, 엄마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과 엄마가 태어나 처음 살았던 집까지 단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모은다. 아들은 엄마가 다녔던 병원의 진료기록을 조회해 당시 엄마를 담당했던 주치의의 진단서나, 병원을 옮긴 후 엄마의 새 주치의에게 보내는 다른 의사들의 편지도 살펴본다. 그렇게 아들이 엄마에 대해 퍼즐조각을 맞춰가려 할 때, 아빠는 깊이 알면 오히려 상처받을 수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아빠가 얘기한 ‘깊이 안다는 것’은 가령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아들은 오래도록 열어보기를 주저했던 엄마의 서류봉투를 꺼내어 연다. 거기에는 아들이 모르던 엄마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엄마는 차의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 몸을 기댄다. 같은 시각, 남편은 시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고, 아이들은 집에서 자고 있다. 엄마는 집에서 가져온 알약을 입에 모조리 털어넣고 삼킨다. 엄마는 곧 의식을 잃는다. 그러고는 곧 그 지독하게 견디기 힘든 슬픔에서 멀어져간다. 이제 더이상은 견디지 않아도 되리라 굳게 믿으며…… (219쪽)
집으로 돌아온 환자는 그 여행이 특정 의도하에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 이후로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자꾸 생각이 불행한 쪽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약을 과다복용하기 바로 전날, 환자는 부친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남동생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뒤 환자는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환자는 기분전환을 위해 유쾌한 영화를 보길 원했지만 친구는 〈보통 사람들〉을 보자고 우겼습니다. 환자는 바로 다음날 자살 기도를 했습니다.” (231쪽)
엄마는 인적이 드문 채석장에서 자살을 기도했었다. 집을 수리하러 온 인부들에게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고 집밖으로 쫓아냈었다. 엄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술과 담배에 절어서 이혼한 남편을 저주했고, 자신을 로마노프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예나 비밀특사로 여기고 지인들에게 연락해 또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렇게 엄마는 서서히 무너졌다. 엄마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여관 주인이 전화를 해오기도 했고, 가끔은 기억을 잃고 엄마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것이 알코올중독과 조울증을 겪은 엄마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만이 엄마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다.
저자는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의사의 진료기록이나 증언들을 종합해 재구성된 과거 회상 부분은 저자인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인 엄마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는 공부를 아주 잘해 전국 학력평가에서 스코틀랜드 내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의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딸을 멀리 보내기 싫었던 외할아버지의 반대에 못 이겨 진로를 바꾸어야만 했다. 대학출판부로 시를 투고하거나 출판사와 번역일을 하기도 했고, 교직생활 경험도 있었다. 요리에 대한 열정도 여전해서 프랑스의 요리 학교 ‘르 코르동 블뢰’에서 요리를 배우기도 했었다. 어떤 게 엄마의 진짜 꿈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는 것, 한때는 엄마를 미워했으나 아들 또한 맨 처음 그러했듯 지금 역시 엄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생전의 엄마는 아들에게 “요리책을 늘 펴놓고 있어야 한다면 넌 요리를 제대로 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모를 통해서 엄마도 요리책을 보고 요리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 역시 요리책을 보고 요리를 하면서 왜 아들에게는 보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
엄마가 요리를 제대로 하는 법을 배우라 했던 건 다름 아닌 그 뜻이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말이나 설명에 기대지 않게 될 테니까…… 그래야 나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먹이는 일을 책임질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엄마의 요리책들을 덮을 수 있을 때, 또한 엄마를 필요로 하는 내 마음의 책을 덮을 수 있을 때, 그래서 나 스스로 터득한 것에, 내 본능에, 내 창의력에,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내 의지에만 의존하게 될 때, 오로지 그럴 때만 나는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테니까…… (292쪽)
요리책이 제시하는 레시피는 평균적인 맛을 약속한다. 요구하는 재료를 지시한 방법대로 손질하고, 계량기를 이용해 필요한 양만큼의 양념을 때맞춰 넣어, 불의 세기나 조리시간 따위를 잘 지켜낸다면 언제나 비슷한 맛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엄마는 자신 없이 홀로 남겨질 아들이 누군가에도 의지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인생의 레시피를 만들어가길 원했던 것이다. 가족을 위해 부엌에 섰던 엄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엄마가 아들에게 남기고 간 것은 한 권의 낡은 요리노트가 아니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법을 깨우치라는 충고였다. 돌이켜보면 살아오면서 여전히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공간은 엄마의 부엌이었다.
아들은 이제 더이상 레시피에 의지하지 않는다. 굳이 요리해 먹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엄마의 죽음을 견디는 2년이라는 시간이 새삼스럽다. 아내 퍼닐라와의 시험관 시술은 두 번에 걸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들은 세번째 시험관아기의 성공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그들은 새로운 생명을, 희망을 기다린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건 혹은 상처를 받았건 우리를 먹이고 길러준 어머니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들을 가슴에 품고 또다시 한 생명의 부모의 되어준다. 이 책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매일 부엌에 서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과 그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자란 우리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새로운 평화를 느꼈다. 완벽하게 각오가 섰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음날의 검사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엄마의 병, 사랑, 죽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영글어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2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