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 한 번도 충성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사유해보지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충성’이라는 단어만큼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아마도 곧바로 군대에서의 ‘무조건적인 복종’ 혹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충성이란 말에서 교련이나 군대를 먼저 떠올리는 한국인들에게 충성은 미덕이라기보다는 의무다. (…) 충성은 무조건적 복종이어야 한다는 게 우리의 통념 아닌가”라는 추천사의 말 그대로 말이다. 연일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는 전(前) 대통령의 재산 은닉과 세금 탈루는 국민과 정의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보스만을 충성의 대상으로 삼은 몇몇 정치가들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해보자. 이들의 소위 ‘저질 충성’을 보고 우리는 충성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 생각해 온 것은 아닌가. 사실 충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우리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근원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다 짚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사용하게 된 역사적 연유를 따지기 전에, 과연 ‘충성’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부정적인 뉘앙스만을 담아서 사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충성이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적인 것이어서 충성의 가치를 묻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충성은 신뢰에 관한 것이다. 믿지 못하는 시대에 친구는 담보 대출로 맺어진 관계만큼이나 불확실하다. (…) 늘 그래왔던 것처럼 충성이 진부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우리는 왜 충성을 계속 찬미할까? 충성은 우리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기 때문이다. 충성이 없으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가족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친구도 존재할 수 없다. 충성이 없으면 공동체나 국가에 헌신할 수도 없다. 충성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 파멸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충성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충성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래서 충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늘 극단을 달렸다. 진실을 배신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 토머스 홉스는 자연상태의 삶이 “고독하고 초라하고 더럽고 야만적이며 부족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발전한 사회에서도 우리는 밤에 문을 잠가야 하고, 사무실의 금고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잠가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삶을 조금이나마 덜 지저분하고 덜 야만적으로 만드는 관계는 우리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관계이다. 도둑이라고 의심이 가는 사람 옆에서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 믿음이 핵심이다. 충성이란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이다.(6~8쪽)
저자 에릭 펠턴은 충성을 ‘신뢰’가 그 근본에 놓여 있는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으로 재정의하고 충성을 ‘우리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근본 중에서도 근본’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우리가 ‘충성’에 대해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관념을 전복시킨다. 저자가 재정의한대로 충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충성은 수많은 함의를 가진 다층적인 단어임을 알게 된다.
충성, 충실성, 믿음, 신뢰, 의리, 헌신, 정조…
이렇게 길게 늘어선 충성의 유사 개념들을 통해 우리는 충성이 인간적 삶을 위한, 가장 근본이 되는 미덕임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충성은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높은 산을 함께 등정하는 팀원의 생사의 운명을 갈라놓는 실제적인 힘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2년 일본군은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전쟁포로들을 강제로 이주하는 작전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 7만명 중 1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바탄 죽음의 행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행군에서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바로 의지할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울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친구, 등뒤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버텨내지 못했다.”(23~24쪽)
1953년 8월 눈보라 속에서 히말라야의 K2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등반에 나선 여덟 명의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보자. 거의 정상에 다다른 지점에서 대원 중 한 사람이었던 아트 길키의 다리에 피가 뭉치는 증산이 나타났고 그를 하산시키기 위해 함께 내려오던 도중 아브루치 능선에서 손가락에 동산이 걸린 다른 한 대원이 밧줄을 놓치며 45도 경사면으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가 떨어지면서 그와 함께 밧줄로 연결되었던 사람들 모두가 추락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밧줄 맨 위에 있던 사람이 길키를 업고 있던 피트 스코닝이었다. 그는 그 상황에서 팽팽해진 밧줄을 팔에 감아 당기기 시작했다. 스코닝이 길키를 업은 채 다섯 명의 무게를 혼자서 버텨주자 밑의 동료들이 밧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었다. 스코닝이 했던 기술은 암벽등반에서 말하는 ‘빌레이belay’이다. 43년 후 기자 존 크라카우거는 돈을 내고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여한다. 등반대에 참여한 사람들은 수십 명에 달했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했으며 6만 5,000달러라는 거금을 지불한 개인적인 탐험에만 골몰했다. 모두 정상에 올랐으나 캠프로 내려오는 길에 여덟 명이 죽었다. 사고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들이 한 팀으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 가장 크다.
높이 걸린 외줄을 타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밑에 안전그물이 쳐 있지 않다면 시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지만, 그물이 쳐 있으면 용기를 내어 한번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도전해서 무사히 반대편으로 건너갔다면, 과연 그것을 그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물은 줄타기를 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물을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만약의 경우 그물은 목숨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처음에 도전을 가능하게 한 것 역시 그물이다. 충성은 이런 그물과 같다. 직접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밑에 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힘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물이 우리를 붙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물이 튼튼한지 허술한지 확신할 수 없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그물이 있다고 기대하고 행동한다 하더라도, 정말 그물이 자신을 떠받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실제로 떨어져봐야 알 수 있다. 결국, 자신을 위해 그물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물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직한 사람들을 우리가 그토록 칭송하는 이유다.(29~30쪽)
이 충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범죄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를 범죄심리학적으로 수사 기법에 활용하는 ‘리드기법’에서도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일단 믿는 것이 유리하다. 그렇기에 수사관들은 심문을 받는 대상에게 범죄자가 먼저 배신했다는 확신을 갖게 하고 충성의 유대를 깨트림으로써 유리한 증거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이런 범죄자에게 충성이란 덕목은, 혹은 이들 범죄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이로운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역으로 조직이나 동료에 대해 그런 충성심조차 없는 범죄자들은 훨씬 더 무시무시하다. 오늘날 흔히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이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통제하기 어려운 괴물인 것이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덕’으로 충성을 바라보게 될 때 충성이 가진 다양한 함의와 미덕으로써 충성이 갖는 힘과 본질적 중요성이 파악될 수 있으며 이제껏 훼손되어왔던 충성의 본질적 가치를 복원시켜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에릭 펠턴은 『위험한 충성』에서 ‘충성’이 생존과 정의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와 우정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자 진지한 성찰의 대상임을 다양한 실제 사례에 대한 명징한 분석을 통해 흥미진진하면서도 설득력 강하게 논박해낸다.
충성과 배신의 드라마는 그대로 인간의 역사다 :
위험에서 보호하면서 새로운 위험을 무수히 안겨주는 기묘한 미덕, 충성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신화와 전설, 그리고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 중 하나는 ‘충성과 배신’이다. 대립하는 충성의 대상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에서부터 마피아의 전형이라 할 돈 콜리오네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인간의 역사라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가장 큰 핵심 테마인 것이다. 최근에 가디언지를 통해 미국내 통화감찰 기록과 PRISM 감시 프로그램 등 NSA의 다양한 기밀문서를 공개했던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 Snowden 이야기 역시도 계속 새롭게 만들어져온 이 서사의 최신 버전이다. 그것이 신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를 행하는 성인의 이야기이든, 자신의 정의에 대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을 거부하고 가족을, 어머니를 지키기로 한 카뮈의 이야기이든, 믿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을 당하는 카이사르의 이야기이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죽은 오빠를 매장해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서 고뇌하던 안티고네의 이야기이든,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가족을 고발하도록 아이들을 교육시킨 히틀러유겐트(히틀러소년단)의 이야기이든,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상황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자신의 노모를 먼저 구출한 사람의 이야기이든, 골든글러브 최우수 여자연기자상과 아카데미상을 연이어 받으며 남편에 대한 믿음으로 행복이 가득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수상소감을 말했지만 불과 일주일 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쓰디쓴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샌드라 불록의 이야기이든, 그것이 충성과 배신이든, 믿음과 배신이든, 의무와 배신이든, 정조와 불륜이든 이 모든 ‘충성과 배신의 드라마’는 항상 어디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 충성과 배신의 드라마가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자 계속 새롭게 변화되는 이야기인 것은, 충성이 다양한 충성의 대상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고뇌하고 갈등하게 하는, 몹시 성가시게 하는 까다로운 미덕이자 이러한 ‘충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나 조직 아니면 정의나 이상에 충성할 것인지, 가족에 충성할 것인지 이념에 충성할 것인지, 자신의 욕망에 충성할 것인지 사람에 충성할 것인지, 우리는 매 순간 어디에 충성해야 할 것인지, 어디에 헌신해야 할 것인지, 어디에 믿음을 보내야 할 것인지 흔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흔들고, 도덕적인 딜레마를 낳으며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언제든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충성은 도전과 좌절을 초래한다. 하지만 모든 좌절이 그렇듯, 모순되는 충성의 까다로운 갈등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어떤 충성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가 진정으로 충성하는지, 누가 충성을 악용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충성은 오류를 피할 수 없으며, 또 피해갈 수도 없다. 충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나약함에 의해 쉽게 타락할 수 있는 미덕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폐기해버린다면, 사랑과 믿음과 헌신도 함께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283쪽)
충성의 본질적 가치가 훼손되어 있는 만큼, 충성이 항상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 만큼, 우리에겐 충성의 본모습과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충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고민과 자기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스노든이 택한 ‘양심을 건 폭로’의 방식이든, 그 이전의 부끄러움과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이든 충성을 되세우기 위한 자신의 방식에 대한 고민은 간절하다.
국가가 공정하게 운영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면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충성이란 국가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분노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것이 아닌 것,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분노하지 않는다. 부끄러움과 분노는 그 자체로 충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든 국가든 그만큼 우리가 헌신하고 있다는 의미다.(260~261쪽)
에릭 펠턴의 『위험한 충성』은 충성을 통해 본 인간 본성에 대한 입문서이자 우리가 이제껏 제대로 들여다 본 적 없던 ‘충성’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