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등단 2년 만에 뚜렷한 개성을 확보하며 문단의 각별한 주목을 받아온 신예 여성작가 하성란의 첫 창작집『루빈의 술잔』이 출간되었다.
하성란의 소설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의 절실함에서부터 미세한 삶의 영역까지를 인화지로 찍어내듯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로 담아내고 있어 요즘의 신세대 작가들과는 또다른 개성적인 면모와 견고하면서도 절제된 문체미학을 확보하고 있 다는 찬사를 받아왔다. 그녀의 첫 소설집『루빈의 술잔』은 "젊은 세대가 살고 있는 삶의 정경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문제의 본질에 도달하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표제작에서부터 등단작「풀」에 이르기까지 파랗게 살아 있는 현재형의 묘사로 우리 소설에서는 흔치 않은 성과를 보여준다.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은 현대의 각박한 일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 비판에는 삶의 쓸쓸함과 존재의 소외를 위무하 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다. 냉정과 연민, 환멸과 위로, 침묵과 웅변이 동시에 명멸하는 그녀의 소설은 이제껏 그 어떤 이야기꾼이 나 기막힌 영화의 귀재도 선사하지 못한 깊은 감동과 따스한 연민, 그리고 생을 둘러싼 우수와 운명적인 인연에의 예감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루빈의 술잔』은 그와같은 강점을 편편마다 지니고 있어 이 신예작가에게 걸고 있는 문단과 독자의 기대에 충 분히 값하고 있다.
젊은 작가 하성란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풀」이 당 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치밀하고 정교한 묘사와 절제된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문단의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생의 빈 공간을 채우는 따뜻한 연민
신예작가 하성란은 첫 소설집『루빈의 술잔』에서 현대 도시의 건조한 일상과 지루한 풍경, 그 속에서의 소통이 불가능한 사 막 같은 인간관계에 대해 면밀한 탐색을 시도한다. "무중력 상태의 캡슐" 같은 일상에서 유예된 시간을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익명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름 없이 여자나 남자 또는 기역이나 K와 같은 삼인칭 지 시어로만 등장한다. 이러한 익명성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집요하게 탐문한다. 나른한 권태에 빠져 있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존재의 익명성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 포착된 단절적 인간관계를 매우 잘 보여준다. 이 점은 가까운 인물의 느닷없는 사라짐으로 표현되는 실종 모티프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표제작인 중편「루빈의 술잔」에서는 P백화점이 붕괴한 갑작 스런 사고로 죽음조차 확인되지 않는 남편이 등장하고,「내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등허리였을까」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가짜 악어 가죽 핸드백과 다듬다 만 고추만 남겨놓은 채 사라진 K가 있으며, 이복자매의 이야기를 다룬「두 개의 다우징」에는 십오 년 전 에 행방불명된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 실종 모티프는 탈각당한 개인성의 흔적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대 인의 지난한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며, 균열된 일상 속에서 소멸되기 직전의 운명에 처해 있는 실존의 적나라한 초상을 냉정하게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실종이란 삶의 또다른 측면 혹은 인간의 전혀 다른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와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실종의 모티프를 동원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루빈의 술잔」 의 여자는 남편의 실종 이후 폐쇄된 삶을 살다가 자신과 주민등록번호가 같은 여자의 집을 찾아가 그녀처럼 살면서 삶의 새로 운 가능성을 되찾는다. 이런 면에서 하성란 소설의 금욕적이며 절제된 문장 속에 스며 있는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녀 는 파편적으로 던져져 있는 인물들 각각의 건조한 일상과 고독한 내면을 정밀하게 묘사하지만 동시에 어느 순간 생의 빈 공간을 채우며 홀연히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따뜻한 연민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파랗게 살아 있는 묘사, 탁월한 문체 미학
하성란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의 하나는 마이크로식 묘사체로 일컬어지는 정밀하고 꼼꼼한 묘사와 주관이 극도로 절제 된 문장, 그리고 대명사의 의도적인 배제와 속도감 있는 현재형의 사용 등 독특한 문체적 스타일에 있다. "작은 행동에서부 터 모든 제스처에까지 현재형의 묘사가 파랗게 살아 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적절한 스피드로 포 착하기 때문이다"(김화영: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마이크로 묘사의 한 가지 전형을 보인 하성란은 이제 소 설의 현장성 확보의 수준에 올랐다"(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묘사 능력은 그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
그녀의 치밀한 묘사는 최근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단문체의 경쾌함이나 과감한 묘사의 생략에서 연유하는 스피디한 문장 과도 격을 달리 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장인적인 수공업 정신으로 오랜 기간 연마한 작가의 수련의 흔적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 는 이러한 점을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오랜만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며 "고전적인 엄격함으로 빛나는 묘사 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소설 미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하성란의 문체는 우리 소설사의 결락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구차한 설명없이 그녀는 한순간 생의 전모를 말한다
하성란의 소설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으며 경박하지도 않다. 고전적인 엄격함을 갖추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수성의 독특한 세련미를 동시에 과시하고 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고집과 자기만의 방법론을 향한 열정은 소중한 덕목이다"라 는 평에서도 알 수 있듯『루빈의 술잔』에서 드러나는 정련된 문체와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생의 여백에 대한 명민한 통찰은 90 년대 소설의 주목할 만한 성과임에 틀림없다. "장황한 수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생의 빈 공간에 대한 탐사와 아득하게 펼쳐지는 여백미는 하성란 소설이 포착해낸 득의의 영역이다. 구차한 설명없이 그녀는 한순간 생의 전모를 말한다." 그녀 의 소설은 소통 불가능과 소외로 신음하는 현대인의 일상에 가득 찬 생의 쓸쓸함을 완전히 벗겨내는 따뜻한 연민의 세계로 우리 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