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라는 작은 책 한 권으로
세계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깨고 양심을 뒤흔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
그의 마지막 자서전!
“혹시 우리는 너무 쉽게 ‘멘붕’과 좌절을 말한 것은 아닌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희망을 불신하게 된 그대에게
“우리는 이 비열한 도살장에서
유일한 무기로 여겼던 민주주의가 승리하게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절망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에 대한 믿음을 품었다.”
_본문에서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 한 권으로 세계인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깨뜨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2012년 발표한 마지막 자서전이 출간된다. 지난 2월 27일, 향년 95세로 타계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붐이 일고 있다.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인 2012년 프랑스에서 발표한 자서전으로, 원제는 “Tous comptes faits... ou presque”, ‘이제 모든 것을 말하지요… 거의 모든 것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목수정이 번역했다.
마치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진보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불꽃같은 신념으로 자신의 지난 삶을 낱낱이 회고한 그의 마지막 자서전은 우리의 잠자고 있던 양심을 뒤흔드는 잠언들로 가득하다. 그는 몸에서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과 난맥상을 지켜보면서도, 세상은 진보해왔으며 여전히 더 큰 진보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것은 그가 낙관적이거나 절대적인 좌파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주의가 역사의 진화를 명백히 관찰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
스테판 에셀의 사후 그를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안장하자는 청원서를 올린 정치가들에는 좌파와 우파가 따로 없었다. 에셀이 지지해온 사회당과 녹색당은 물론 우파인 대중민주연합의 정치가들까지그의 죽음 앞에 고개 숙였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의 사상’ 그 자체”라고 추모했다. 그가 진영을 넘어 이렇게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리고 그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교조적인 관점을 벗어나 미래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그가 이러한 사상을 구축하기까지 그의 생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만남과 모험이 펼쳐진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며 자유와 행복을 향해 질주해 영화 <쥘 앤 짐>의 여주인공 모델이 된 어머니 헬렌 그룬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메를로퐁티, 다니엘 컨벤디, 에드가 모랭 등의 사상가들과의 전율 어린 만남, 그리고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서른네 살이었던 ‘친구의 어머니’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비롯해, 그의 생애 단 한 번 찾아온 동성애 경험 등 그 자신의 아주 특별한 사랑의 연대기가 담겨 있다.
‘분노하라’라는 강력한 슬로건과 레지스탕스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스테판 에셀의 인간적인 매력, 그리고 『분노하라』가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돌풍 이후, 스테판 에셀이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 마지막 자서전에 응축되어 있다.
“그는 체 게바라도, 마르크스도, 부르디외도 아니었다. 그저 행복에 대한 취향과 정의에 대한 각별한 신념을 가진 콧구멍에서 늘 흥이 넘쳐나는 한 은퇴한 외교관이었을 뿐. 전 세계가 그를 에워싸고 그의 말을 들으며 열광했던 것은 그 말 속에 새로움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삶이 뿜어내는 생명력과 환희에 넘치는 기운이 모두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매혹의 화신이었다.
에셀은 손끝까지 저려오는 충만한 개인의 행복이 끊임없는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활동가의 삶과 얼마나 조화롭게 병행될 수 있는 것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포근한 위로를 전하는 것은 바로 삶과 투쟁이 화해할 수 있게 해준 그의 한 세기의 삶이 모두에게 한없이 큰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이다.”_목수정, ‘역자 서문’ 중에서
“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에 감탄하라!”
스테판 에셀, 콧구멍에서 흥이 넘쳐나는 한 매혹적인 투사의 일대기
에셀은 한 인간이 어떻게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진정 100% 청년으로 살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1세기에 가까운, 충만하고도 활력으로 가득하던 삶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0살까지 산 레비스트로스나 얼마 전에 죽은 대처가 오히려 그들의 죽음이 그들이 한때 살아 있었음을 알렸다면, 에셀은 94세에 발표한 이 책이 하나의 증거물이듯, 죽음을 앞둔 그 마지막 호흡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눈 삶이었다.
지식의 감옥에 갇히거나 안온한 노년의 평화 속에 주저앉지 말고 참여하는 것, 맹렬히 세상을 움직이는 노를 젓는 하나의 손이 되는 것, 우리가 믿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가 한 세기를 줄곧 청년으로 살아낸 첫번째 비법이라면, 또하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그간 그의 사상과 행보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어머니 헬렌 그룬트는 남편 프란츠 에셀을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훗날 영화 <쥘 앤 짐>의 원작자가 된 소설가 앙리피에르 로셰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앙리피에르 로셰를 질투했던가. 내 어머니는 그의 아이를 갖길 필사적으로 원했고, 만일 아이가 생겼다면 나와 내 형을 두고 또다른 사랑을 완전하게 체험하기 위해 떠나갔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두 아이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품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보다 더 절대적인 열정을 위해 두 아이를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다,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나누는 사랑을 곧바로 지지했다. 어머니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보호할 것이며 그들의 계획이 실패한다 해도 어머니의 연인 또한 내게 소중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_「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에 감탄하라」 중에서
그는 세인의 시선으로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유분방한 사랑을 지켜보며 독점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 사랑을 배웠다. 스테판 에셀에게 ‘사랑’은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가 열일곱 살 때, 서른네 살 난 ‘여자친구의 어머니’와 연인관계로 지내며 “아직 성을 경험하지 않은 17세 소년이 여성의 몸에 대해 꿈꾸는 모든 비밀”을 깨우치게 된 일, 또한 제2차세계대전 중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모른 체해주었고, 아내가 그 관계를 정리한 이후에는 오히려 그 남자와 진한 우정을 나눈 이야기, 삼십대 초반에 만난 한 여인과 평생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누었고 일흔이 넘어 아내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여인과 재혼한 이야기 등, 에셀의 기이하고도 비범한 사랑의 여정은 어쩌면 그 어머니로부터 기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극단적인 제약이 가해진 전쟁중에도, 스테판 에셀은 아주 특별한 사랑을 체험한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제2차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에 아직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주던 한 미국인 남성과 동성애를 경험한 것이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이 자유롭고 인간적인 혁명가는 더이상 숨길 것도,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인생에 깃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각양각색 사랑의 역사를 회고한다. 그리고 “질투하지 않는 사랑의 방법을 체득하고 모든 사랑의 모험에 주저 없이 나섰던” 이 경쾌한 젊은이는 훗날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을 가로막고 경계 짓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누리는 그 행복을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뜨려야 한다.”
(…) 절망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많은 경계선들이 그만한 수의 문이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문들을 통해 정의로운 ‘인간사회 공동체’에 다다를 것이다. _「다중 정체성의 시학」 중에서
좋은 인생은 우리가 쌓아온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가슴에 새겨준 사명대로 그는 불굴의 의지로 행복을 찾아나섰지만, 언제나 원하는 대로 행복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실패와 불운을 떠안고 산 사람이었다.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에 유대인으로 머물러 있었고, 나치의 횡포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시작했지만 오래지 않아 체포되어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어 몇 차례나 처형될 뻔했다. 한때 유엔의 외교관으로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일들을 계획했지만, 그가 촘촘히 만들어갔던 보고서와 꿈 들은 상사의 서랍 속에 들어가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가 온 힘을 기울여 전파하고자 한 세계인권선언문조차 그저 우리가 가닿아야 할 이상으로서만 존재할 뿐, 법적인 효력을 갖는 나라는 없다. 그가 말년에 전 세계인들에게 온 힘을 다해 알리고 해결점을 찾고자 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아주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내 전기를 자세히 훑어본다면, 거기에서 아주 작은 몇 개의 성공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실패를 발견할 거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패들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실패들은 내게는 더 멀리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로 보였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아직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실천과 정치 참여가 아직 성공의 화관을 쓰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인생은 우리가 쌓아온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다.
_「다중 정체성의 시학」 중에서
그 모든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보와 희망에 대한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에게 노인이 되어서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라며 빈정거리는 ‘현실주의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진정한 현실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지, 정해진 한계를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오늘을 사는 세대와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하라!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라!
그대여,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유럽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필요하고, 미국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의 지구에서 60억의 인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면, 그는 이 현실 가운데서 가능한 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길 꿈꿨다.
그는 “민주주의란 가장 가난한 자들을 불행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만큼 지녀야 할 책임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가난을 줄이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특권에서 소외된 자들이 행복한 국민이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기울여야 할 노력이며, 요즘 더이상 행해지지 않는 노력”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개인의 행복도, 자유도, 사랑도, 또한 우리의 정치체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민주주의’도 노력해야만 가닿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자신의 한 세기에 가까운 삶으로 그 신념을 증명했다.
“민주주의는 자연 속에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노력을 기울여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이상향이다. 민주주의는 긴 여정이며, 우리의 정치체제는 완결판에 이르기엔 아직 멀었다.”_「민주주의―모든 프로그램!」 중에서
그 모든 실패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믿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불행에서 빠져나와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행복해지길 바랐던 스테판 에셀. 진보와 사회참여의 꿈을 품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될 그의 메시지는 이제 그가 남긴 몇 권의 책들로 남았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죽음을 일 년 남짓 앞둔 스테판 에셀이 투사와 사상가의 갑옷을 벗고, 100년에 가까운 지난 삶을 나비처럼 거닐며 “완전히 좌절에 빠져 더이상 희망을 믿지 않으며 출구를 찾을 의욕조차 갖지 못하게 된” 후세인들을 향해 조용히 손을 내민 마지막 자서전이다.
“스테판 에셀이 죽었다.”
95년간 타오르던 에셀이라는 촛불이 조용히 꺼졌을 때, 프랑스에 술렁인 것은 슬픔이라기보다 경외감에 휩싸인 탄식이었다. 감동을 자아내는 죽음이라니. 경이로웠다. 한 사람의 생애가 건넬 수 있는 그토록 넓고 포근한 위로가.
이제 더는 지상에서 지속될 수 없는 그의 삶은 책으로 남았다. 이 책은, 스테판 에셀이 자신의 삶의 내밀한 순간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고백이자, 이제 곧 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갈 것을 느끼는 한 인간이 남은 세대의 손에 쥐여주는 간절한 유언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일 년 남짓, 그는 마지막 남은 모든 기운을 다해 후세에 전해줄 말을 찾고 다듬고 재차 다짐했다. 죽음도 차마 멈추지 못할 진보에 대한 그 간절한 희망과 신념을.
_목수정, 옮긴이의 말에서
한 권의 책이라는 틀은 불꽃처럼 뜨겁고 투철한 스테판 에셀의 삶과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의 말은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뒤흔드는 강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스테판 에셀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돌아보고 있지만 우리의 미래에 대한 커다란 용기를 선물한다. 이 책에는 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앙가주망engagement(정치참여)’을 뒷받침해주는 진실한 경험들, 그리고 남다른 삶을 택함으로써 그가 발견해낸 인생의 선물이 담겨 있다. _마렌 셀(리벨라 출판사 편집인)
● 본문 속으로―『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에 담긴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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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라, 창조하라, 그리고 희망하라. 인간은 희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하라.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라.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이들은 모두 옳다. 그러므로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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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 그 과정에서 진보하는 것과 퇴보하는 것, 집단적인 압력과 개인적인 저항 사이의 심한 모순들이 뒤엉킬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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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윙거는 저서 『반란의 조약』에서 고통받는 세계 속에서는 개인의 평정이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형제가 아래층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바로 위층에서 요가 강좌를 열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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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변 사람들을 잃는 최악의 경험을 한 바 있다. 부헨발트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36명이었다. 그 36명 가운데 16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4명은 총살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3명뿐이었다. 나는 절망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나는 내 눈앞에서 펼쳐진 그 모든 일들, 경악스럽고 참을 수 없는 모든 일들로 인해 완전히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든 것을 향해 분노로 맞서고자 했다. ‘분노’야말로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이것은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모든 이들에게 내가 전해주어야 할 메시지라고 느꼈다. 인간의 삶은 분명 뭔가 유용한 일에 쓰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삶은 사랑, 시, 상상 등 아주 많은 유쾌한 일들에 쓰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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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시민은 그것에 대해 항의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시민은 투쟁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분노를 통해서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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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탐욕과 야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비열함과 저속함에 단숨에 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한 이 작은 길에서, 소박한 차원일지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이것이 첫째 조건이다. 우리 자신의 정원에서부터 이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만약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일상적 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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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요구하라!
내가 현실세계와는 동떨어진 꿈을 꾸며, 인간사회가 운용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이상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매우 허황된 꿈처럼 보이는 것들이 반드시 믿을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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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나에게 반대하고 나를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취급할 때면, 나는 내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고백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반론이 아니다. 현실은 우리가 모든 확신과 희망을 잃을 만큼 충분히 맥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이 매우 쓸 만한 일로 느껴지곤 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그 긴 세월의 힘을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거리를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일도 겪었고, 그 힘든 일들 속에서 언제나 해결방법을 찾아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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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정확한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최대 다수가 최고 수준의 교육과 건강, 주거 환경을 누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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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이 자신의 국가를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국가가 아니라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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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의 양심이 살아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마스쿠스나 예루살렘, 바라나시 혹은 라싸로 가는 길에 있음직한, 영원한 축복의 초월적 개입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이 초월적인 힘에 기대게 되는 것은 용기와 실천력이 심각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의 희망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초월적 존재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도움을 바라며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의 도래를 기대하는 순간, 우리는 싸움에서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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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노하라”고 말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귀기울였다. 그러나 내가 다가올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더 근본적인 메시지는 용기와 회복탄력성résilience이다.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그리고 가장 고차원적인 희망은 극복된 절망이다.” 그렇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맞서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노는 우리가 거쳐야 할 첫 단계이고 필요한 단계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분노 이후에는 사상과 예측 그리고 다르게 해보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분노는 하나의 명백한 의도와 연결될 때만 가치를 발휘한다. 분노 자체는 명석함의 표식이 될 수 없으며, 분노를 정당화하는 뚜렷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분노 자체만으로는 세상의 이해를 도모할 수 없으며, 세상의 이해를 도모할 수 없는 분노는 허공에서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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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우리를 자각하게 해주고, 의식을 일깨우고, 체념한 사람을 무관심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좌절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일에 맞서 저항하고 싸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게 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의 첫 단계, 붉은 신호등, ‘길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 도약의 순간이 또다른 움직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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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분노, 그리고 분노하라는 권고는 상스러운, 즉 ‘고결하지 못한’ 공동체에 속했다는 불만스러운 실망의 감정에 기초하는 것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긍지를 되찾겠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분노’의 뿌리인 셈이다. 분노하는 자는 자신이 존엄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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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려움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겐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멀게만 보이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들끓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느낀다면,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음을 느끼고 충분한 힘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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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건들은 뛰어넘어야 할 장벽일 뿐이며, 더 멀리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동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이 강화해온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가져다주는 회의주의가 침투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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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정에 투자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위대한 사랑이 선사하는 도약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그 사랑이 반드시 서로 주고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고백하건대 나는 서로 주고받는 사랑을 종종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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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나’라는 존재와 내 영혼을 만들어낸 내 삶의 방식에는, 뭔가 결론적으로 말할 것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살아오고 행동하고 참여한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타고난 그대로 머무른다면, 내면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인생은 일종의 낭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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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세상을 돌려주자.
나는 곧 이 조화로운 세계 어딘가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죽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력이 떨어지는 것을 곧잘 느낀다. 내 노쇠함이 기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면 또 어떤가. 이대로 지켜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