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뭐냐……
사물들 위로 내리꽂히는 번개들의 찰나를 품는다!
짧지만 굵은 사유의 보폭
고은의 대표 선시 180여 편
고은 시인의 선시집 『뭐냐』를 재건하여 여기 내놓는다. 이십여 년 전 빛을 봤던 시집이라지만 이후 그가 여기저기 발표하고 써두었던 선시들까지 두루 넣었으니 거의 새집과 진배없는 『뭐냐』. 우리가 잊고 있는 사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이탈리아어 등 세계적인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현재 보다 많은 언어들로 번역 가운데 있다니, 시인 고은의 저력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따지고 보자면 이 시집은 ‘선’의 세상 속에 뿌려진 소금이 아닌가. “사고를 정지시키는 공안(公案)과도 같은 정신의 폭죽들” “깨뜨리기에는 단단한 견과, 하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듯하다”라고 고은의 선시를 평한 알렌 긴즈버그의 소견을 보라. 번역을 통해서도 그의 시는 의미나 감정 전달에 손해보는 바가 전혀 없었다는 증거일 터, 놀라움이 앞선다. 뭐냐, 라고 내게 온 질문을 다시 뭐냐, 라고 되받아칠 때의 메아리, 그 울림을 타고 서로에게 전해지던 수많은 관념들이 어느 순간 말줄임표로, 그 침묵으로 자연스레 자연이 되어가는 현장…… 여기 고은 시의 바다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이 말이다. 그렇다는 얘기다.
굳이 따지자면 총 180여 편의 시를 담았다지만, 고은의 『뭐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편들로 직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시로 거듭나기에 충분한 한 줄의 시가 매 순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보다 광대한 사유에 하이쿠보다 자유로운 품격으로 붓 든 자 아이인가 붓 든 자 노인인가 그 사이를 가늠할 바 없이 오고 가는 시인은 “우주 만물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기미들을 살피고, 그 안에서 돈오의 알곡들을 골라”내기에 몹시도 분주한 모양새다. 때론 강권하고 때론 청유하고 때론 질문하고 때론 감탄하면서 시인은 마치 세상에 처음 온 듯, 그 처음으로 호기심밖에 가진 게 없다는 듯 걸음마다 두리번거림을 한 짝으로 삼고 있다.
저는 산더러
너는 뭐냐
너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메아리」 전문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가
가장 한심하여라
칼로 쳐라
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다
소가 쇠고기가 되어가는 동안
-「쇠고기」 전문
편할수록
불편하다
더 불편하다
왜 올가을이 내년 가을인가
-「일기」전문
활 쏘아
핑
화살 박힌 데 네 눈
네 암흑의 아픔으로 달 떴다
-「달」전문
그렇게 첨벙첨벙, 시인의 상상력이 향해가지 않는 곳은 없다.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찰나의 물음들, 알고 보면 사물에 대한 보살핌의 언어일 그것에서 어떤 답을 찾겠다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래, 그저 웃지요, 라고 답할밖에. 애초에 시인은 답을 뒤에 감추고 어디 한번 맞혀들 보라면서 신의 형상으로 문제를 낸 자가 아닌 연유다. 시인은 언어 이전이고 언어 이후라서 그 자체가 본래면목이지 판단과 분별의 칼을 쥔 자가 아닌 까닭이다. 시인은 보이면 보이는 대로 말하고 들리면 들리는 대로 말하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자다. 순간순간 이런 찰나들을 노동이 아니라 놀음으로 삼으니 “말을 쓰면서 말을 버리고, 사유하면서 사유를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말랑말랑한 언어들을 시인의 일갈이라 귀 기울이게 되는 건 시집 군데군데 들어 있는 시인의 그림을 통해서다. 붓 끝에 힘이 들었으나 제목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꽉 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빈, 큼지막한 그 원을 우주라 할 때 시인의 호통은 그에 가서도 멈춤이 없다. 어쨌거나 “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과 함께 “너는 뭐냐”라는 물음의 망치를 한데 내려쳤을 때 여지없이 깨어질 우리들, 그러나 우리들은 정녕 그 덕으로 깨어나는 것이 않을는지. 우리들이라는 애초의 분간조차 희미해진 채로.
● 서문
새로운 세계! 그 세계를 찾아 나선 자가 있다면 그에게 물을 주고 싶다. 그의 지친 몸의 갈증을 달래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불을 주고 싶다. 추운 밤의 모닥불로 언 몸을 녹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단단한 쇠를 주어 세찬 바람에 그것을 의지하여 휩쓸리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러나 진흙으로 만들어진 자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들어진 자는 불구렁에 가까이 갈 수 없다. 제법 단단한 쇠붙이로 만든 자라 한들 1백 년 세월 안에 한갓 녹
슨 건달이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 건달 하나가 있으니 스스로 젖어서 진흙이 없어지고 스스로 불붙어 나무가 없어졌다. 비바람에 녹슨 쇠붙이 역시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다.
가거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으니 그곳이 새로운 세계 아니겠는가.
선(禪)은 우선 말과 글을 부정함으로써 그 생명을 삼는다. 얼마나 통쾌무비한 일인가. 하지만 여기에는 선 수행의 배경도 현실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인도의 선을 받아들인 바탕으로써 노장철학이 있지만 정작 고대 중국의 불교는 너무 빨리 상류계급의 웅장한 형이상학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과 글의 특권층으로 행사되기 십상이었다.
바로 이에 대한 강력한 민중적 부정으로써 그 말과 글의 행위를 타파하는 것이 곧 선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선은 글을 아는 자로부터 글을 철저하게 버리게 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선은 승려 중심의 체제에서 벗어나 세속의 평민이나 노예가 그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기 시작했다. 제3조(第三祖) 승찬과 제6조 혜능이 바로 그들이다.
오직 선은 마음뿐이다. 이 마음속의 진면목으로만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일체를 부정함으로써 일체의 진실을 획득하는 선은 그 부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유로운 선문답과 선시를 낳을수 있게 된다. 8세기 무렵의 선은 이미 선문학의 시대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문학은 그러나 기존의 말과 글로부터 해방된 고도의 정신행위이며 전혀 낯선 비약이기도 하다. 바로 이 낯선 상태의 생명력이 선시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같은 생명력은 굳이 선시라고 이름 짓지 않은 모든 시 가운데서도 반드시 선시적인 어떤 긴장과 절박함, 그리고 대담한 생략의 매혹이 구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시는 충분히 선시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일본의 하이쿠도 이 같은 선시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게 그 한 줄 가운데 사람의 심상(心象)과 사물의 단면에 대한 직관을 이루고 있다.
불교 경전은 그 문학적 분류 방식에 따르면 대체로 열두 종류이다. 이 가운데서 순수한 운문으로 된 ‘가타(gatha)’가 있고 산문으로 서술한 것을 운문의 형식으로 강조하는 ‘게야(geya)’가 있다. 굳이 여기에서 선시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고대 중국 당나라의 산중에서 선시의 황금시대를 이룬 나머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시 1천 년 이상의 역사를 쌓고 있는 것이다.
선은 시와의 일치 이외에는 다른 글놀이의 장황한 서술과 묘사를 받아들이는 일 없는 특징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선사(禪師)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나는 선의 생활 10년의 지난날을 통해서 선시적 체험을 어느 만큼 지니고 있다. 이 체험의 다른 쪽에 있는 문학의 힘은 아무리 선이 글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문학의 대상으로 삼을 자유가 있다는 사실에도 익숙하다.
그것은 내 시의 생활 35년의 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이 선시집 『뭐냐』는 선시의 역사에 충실하기보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또하나의 선의 행위이자 시의 행위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물과 불, 그리고 쇠와의 만남이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나의 끊임없는 꿈 때문이다. 어미가 새끼의 일을 알듯이 새끼가 어미를 찾듯이 그 세계에 대한 사랑이 곧 선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뭐냐!
2013년 2월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