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수사와 문학적 장치 속에 감춰진 놀라운 사상
『장자』의 놀라운 점은 문학과 사상이 서로 절묘하게 얽힌 지점에서 겹겹의 사유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기본적으로 『장자』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해석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장자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력에 따라 장자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로 새롭게 잉태될 수 있다. 이는 닫힌 체계를 열어나가는 장자의 해체적 태도에 공명하는 서술구조다. 또한 장자는 중층적 함의를 지닌 사상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탁월한 서사적 장치를 사용한다. 현란한 수사와 문학적 장치 속에 감춰진 장자의 사상을 찾아내는 것은 일종의 퍼즐 게임과 같다. 하나의 주제를 백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로 서술해낼 수 있는 것이 장자의 탁월한 문학성이라면, 백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것은 장자의 위대한 사상성이다.
『장자』에서 현란하게 장식된 언어유희는 일종의 환상의 성이다. 그 외형적 화려함에 주목할 때 『장자』는 위대한 문학이 된다. 그러나 그 문학의 성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문학적 비유의 참된 의미가 말을 넘어서 있음을 보게 된다. 원심성과 구심성의 끊임없는 순환 너머에 있는 그 무엇, 그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 실존하는 ‘나’의 몫이다.
장자의 독특한 사유 문법: 해체와 해학, 차연과 침묵
장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음을 통해 말한다. 여기서의 침묵은 도道를 보존함으로써 그 그림자를 엿보게 만드는 깨달음의 기제다. 또한 장자는 차연différance을 통해 시간관념과 공간관념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여기서의 차연은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부정어법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경험적 사실이 실제로는 주관적 편견이나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밝힌다. 이렇듯 대상과 세계를 판단하는 감성적 확신의 토대까지 해체시킨 후 마지막으로 그는 꿈과 현실에 대해 묻는다.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꿈은 아닌가? 그러나 꿈속에 있는 이상 그 꿈은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삶이라는 꿈속에서 어떻게 그것이 꿈임을 자각할 수 있는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로 간주해서 거기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꿈 환경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세계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오히려 ‘내 생각’이 나를 에워싼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조차도 내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 내가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찬찬히 짚어보면, 나를 괴롭혔던 문제 자체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어지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인생을 향한 깊은 연민에서 나온 사유의 온기
‘장주호접몽’은 장자 사상의 주제가 집약된 우화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가 깬 장주는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 자신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우화의 함의를 살펴보면 ‘장주 꿈에 나타난 나비’와 ‘꿈에서 깨어난 장주’ 사이에는 실제도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나비에서 장주로, 장주에서 나비로의 자유로운 물화物化는 서구 근대 철학에 뿌리 깊게 자리한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현실과 꿈 등의 이분법적 사유를 해체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화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자는 여전히 ‘나’이며, 이 ‘나’에 기대어 ‘세계’가 설립된다는 의혹은 여전히 남지 않을까?
『장자』는 장주와 나비의 구분을 통해 둘을 함께 죽이면서 궁극에는 양자 모두를 살려내기 위한 방편이다. 분별이 환상이고 고통이기에, 둘을 죽이고, 환상과 고통이 소멸한 자리에 ‘함이 없는’ 자재함으로 거듭나도록, 둘을 살린다. 결국 장자가 제시하는 물화는 개념을 넘어선 개념이며, 언설이 담아낼 수 있는 인식 경계의 최종심급이다. 이렇듯 인식의 최전선에서 언어와 유희하는 장자 사상의 근원은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다. “일생을 악착같이 수고하면서도 그 성공은 기약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고생하면서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한다”는 장자의 애틋한 진단은 그 사유의 온기와 더불어 그가 해체한 시공을 넘어 오늘에 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