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이 아프리카다!
그리하여 ‘디즈 이즈 아프리카’다!
아프리카에 미쳐 십 년 넘게, 더 정확히는 십 년 앞서 아프리카를 떠돌았던 한 사내가 있습니다. 출판편집자로 시인으로 이 땅에서의 삶 또한 그리 비릿한 것이 아니었으련만 어느 날, 그는 무언가에 홀리듯 깊이 매료되어 아프리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몰입의 힘은 행복의 다른 말이기도 한 까닭에 그는 퇴직금을 챙겨 생면부지의 땅을 드나들었고, 발이 팅팅 붓도록 아프리카의 예술 전반을 몸에 새긴 뒤로는 쇼나 조각에 이어 부시먼 미술과 웨야 아트 또한 국내에 소개할 수 있었다지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무도 없는 미답지를 헤치고 길을 만든다는 일, 그것이 ‘돈’이 아니라 ‘예술’을 좇는다 할 때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일 수 있으나 많은 것을 잃더라도 한 번쯤 관철시키고픈 가치, 그것을 감행하는 것이 청춘의 소임이라 할 때 그는 아무래도 ‘인생’이란 말의 정의를 산목숨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 정해종, 그는 얼마나 젊은 걸까요. 그는 얼마나 무모한 사람이기에 아프리카에 제 청춘을 바칠 수 있었던 걸까요. 또한 그는 얼마나 예민한 귀를 갖고 있기에 아프리카가 들려준 아름답고 따뜻하며 조금 슬프기도 한 은밀한 속삭임을 그리도 빨리 알아들었던 걸까요. 물론 그 덕분에 아프리카를 다각도로 여행하게 된 우리라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가면 뒤 진짜 아프리카의 얼굴이 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우리라지만 말입니다.
아프리카라면 이 사람, 아프리카니까 정해종,
원시(原始)를 시원(始原)이라는 기원(起源)으로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바로 보게 하다!
『터치 아프리카』에 이어 아프리카에 관해 두번째로 펴내는 정해종 시인의 산문집 『디스 이즈 아프리카』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선 저서가 아프리카 미술 전반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개괄처럼 소소히 쓰였다면, 이번 책은 그를 포함하여 아프리카라는 대륙 전반에 걸쳐 보다 포괄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아프리카의 사람과 동물과 풍경 속 여행자 신분인 그가 겪은 많은 에피소드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유연함이란 기름을 발라주기에 충분하답니다. 그는 애초에 ‘여행(旅行)’이란 두 글자 중 ‘행(行)’에 방점을 찍을 만한 기질이라 “왜 떠나는지를 생각하고 떠날 것”을 염두에 둔 채 아프리카 여행 제1계명을 “그곳과 여기가, 그들과 우리가 ‘같다’라는 동질적 인식”으로 삼았다고 해요.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로,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아래로 향해 있거나 찌푸린 양미간을 양산하듯 애초에 무시함이 섞여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하는 데서부터 이 책은 시작됩니다. 아프리카라는 특이성은 있지만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부터 생활에 이르기까지 시인 정해종의 태도는 별스러운 것도 별스러울 것도 없이 밋밋한데다가 그 어떤 편견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아프리카가 마치 대단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곳에 가 멈춰보면 우리에게 분명 존재했으나 잃어버린 어떤 ‘정(情)’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소 느리고 다소 불편할 수는 있겠으나 더불어 따뜻했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웅덩이, 그 온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아프리카 마을 곳곳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힌트를 주는 듯합니다. 물론 함께 어울리는 일상으로 말이지요.
십여 분쯤 지났을까, 집으로 달려갔던 청년이 손에 뭔가를 들고 달려온다. 유심히 보니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은 다름 아닌 자전거펌프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손사래를 치며 장난할 기분이 아니라고 얼굴을 붉히자 청년들이 연실 키득거리며 되받는다.
“헤이 브라더, 돈 워리. 하쿠나마타타!”
그때 난 정말 처음 알았다. 자전거펌프로도 차바퀴에 공기를 채울 수 있다는 걸. 따지고 보면 어떻게든 공기만 채우면 되는 일이거늘, 나는 왜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카센터에서 보아온 고압 컴프레서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을까. 둘 더하기 셋이 다섯이라는 간단한 산수를 미적분으로 풀려는 것과 다름없는 노릇이었다. 기계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기계가 없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바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깨닫다니, 순간 부끄러움이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달아났다
청년들에게 콜라 한 병씩을 돌리고 떠날 때쯤, 왜 내 가슴 한구석에 아프리카가 박혀 있는지, 아무 연고도 없는 그곳이 왜 자꾸만 나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들이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엔 또 어떤 일로 내게 유쾌한 감동을 던져줄 것인가. 설마 호스에 입을 대고 불어서 자동차 바퀴에 바람을 넣지는 않겠지. 푸하하.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중에서
아프리카에서 발은 노예가 되고 눈은 귀족이 된다!
아프리카를 생활인으로 여행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어지는 건 쇼나 조각과 부시먼 미술과 웨야 아트에 대한 시인의 집중 탐구입니다. 탄자니아의 아티스트 릴랑가가 미국의 팝아티스트 키스 해링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콜라병에 신기해하던 영화 속 부시먼이 실은 태곳적부터 아프리카 너른 바위 벽면과 동굴에 수많은 암각화(또는 암석화)를 남겨온 최초의 아티스트라는 걸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요. 매 부의 끝에 꽤 많은 분량의 그림과 조각 등의 자료에 캡션을 덧댄 건 활달한 상상력에 재치가 살아 넘치는 생명력의 아프리카 예술을 일단 눈으로 확인시켜주려는 저자의 아름다운 욕심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휴양도시나 유럽의 관광지처럼 쉽게 가볼 수 없는 땅이 아프리카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아프리카 미술과 더불어 흔히 거론되는‘원시미술(Primitive Art)’이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19세기의 인류학자들이 당시의 유럽을 사회 진화의 종착점으로 여긴 데에서 비롯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학자들이 제3세계의 미술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진화’라는 개념이 모든 학문에 번져나가던 19세기 후반이었으며, 미술을 인류의 물질문화가 진보해가는 과정의 반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난 용어에 불과하다. 이 개념은 동양 미술을 비롯해서 그리스·로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모든 지역 미술을 원시미술로 정의해야 하는 명백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문명과 구분하여 사용하는 원시라는 개념은 그 문명의 어떤 측면, 어떤 특징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가 하는 문제를 낳는다. 여기에 이르면 그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적 도덕률,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성과, 합리적 사고체계? 아프리카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도덕적 기준, 사회와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지식과 기술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해왔고, 문명국의 사회구조보다 훨씬 복잡한 부족 조직을 유지해왔다. 다양성과 상대성에 대한 폭넓은 이해 또한 문명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면, 여기서 ‘원시’가 왜 원시인지 설명할 길이 막막해진다. 원시(原始)를 거꾸로 읽으면 시원(始原)이 된다. 아프리카 미술은 원시미술이 아니라 시원, 즉 기원의 미술이다. ‘Primitive Art’가 아니라 ‘Origin Art’라는 것이다.
-「칼라하리는 목마르다」 중에서
『디스 이즈 아프리카』는 친절한 의미로서의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저자 역시 여행 작가도 아니고 미술 관련 전공자는 더더욱 아니지요. 시인의 주된 특기인 그만의 ‘직관’으로 아프리카 전반을 바로 본다는 일의 이의, 게다가 상상이 아닌 일상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 여러 날들 가운데 반드시 기록해야 할 것들만 남겼다는 데서 이 책은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에 있어 그간의 빚짐을 되갚아나가고 있는 현장의 바로미터가 아닐까도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또다른 각도를 제공했다는 자부심이 오늘날 그를 있게 했다는 구절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는데요, 손에 쥐었다고 해서 온전히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라는 그의 반문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가 아프리카로부터 배운 건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과 같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삶의 방식, 그에 대한 무한한 인정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