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매체다! 매체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새로운 운명
새로운 학문적 화두를 촉발시키기 위한
국내 인문학자들의 학술서,
문학동네에서 세계를 공부하는 그 첫발을 내딛다!
【저술 의도】
국내 학계에 문자에 관한 학문적 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매체학으로서의 문자학 입문서
지금껏 국내 학계에서 문자학 연구는 문자의 종류와 역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매체학적 입장에서 문자를 코드와 기호로서 진지하게 다룬 본격적 문자 연구는 거의 전무후무하다시피 했다. 이는 새로운 기술매체 시대에 정작 문자는 문자로서 사유될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말을 심심찮게 거론했던 학계의 전망을 무심한 눈으로 성찰하게 한다.
저자 정항균은 이를 감지하고 국내외 학계의 문자 연구 전반의 역사를 쫓으면서 국내에 본격적인 문자학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문자로 쓰인 텍스트를 공부하는 문학전공자로서, 앞으로 문자의 지위와 운명을 되묻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자란 무엇이며, 어떤 역사적 전개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말과 문자의 관계에 대한 오랜 철학적, 문학적 입장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해간다. 또한 매체학의 일부로서 문자학을 새롭게 정립하여 독자들에게 그 영역에 대한 기존 연구를 소개하는 동시에 그것과 비판적으로 대결할 것을 제안한다. 그 첫 제안이자 실천으로서, 저자는 베른트 쉐퍼Bernd Scheffer의 『문자영화Schriftfilme』에서 빌린 말인 “typEmotion"을 과감히 이 책의 제목으로 가져왔다. 독자는 이 책제목을 발음하려고 하자마자 음성중심주의에 길들여진 역사가 일깨우는 문자의 유희적 기능―‘type in motion’과 ‘type´s emotion´ 사이의 이중의미를 가로지르는 활자―을 성찰하는 동시에, 음성중심주의 비판 및 소극적 문자 지위에 대한 저항―발음되지 않는 큰따옴표????????의 독자성과 인용부호가 지닌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자각―에 동참하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제목은 그 자체로 문자학 공부로 들어가는 열쇠이며, 이 책은 매체학 관련한 본격 문자 연구로 들어가는 문자학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세부 소개】
학문적 배경을 소개하는 이론과 구체적 작품 분석의 실제가 어우러진 구성
저자는 이 책에서 모든 작품은 문자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문자의 과거, 현재, 오늘을 철학과 문학 영역을 중심으로 살핀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필사문화에서 인쇄문화, 서사학과 문예학, 문학과 매체학으로의 전환은 말과 문자 사이의 해묵은 관계를 조감할 수 있는 키워드이자 문자에 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으로서, 이 책의 구체적 장을 일별할 수 있는 세부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부의 두 장에서는 이론편을 소개하고, 제2부의 두 장에서는 그 이론의 구체적 적용 사례를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제1장 「음성중심주의와 문자 비판」에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를 중심으로 음성중심주의 전통과 그에 대한 문자 비판의 역사를 짚어간다. 제2장 「문자의 형상성―가치의 경제학에서 해체의 놀이로」에서는 옹, 데리다, 키틀러를 참조하며 음성중심주의를 벗어난 문자의 지위 변화에 대한 현대 담론을 살핀다. 제3장은 E. T. A. 호프만의 『황금 단지』와 보토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음성중심주의의 전통을 일별하고 있다. 제4장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빈그룹과 슈투트가르트그룹으로 대변되는 독일 구체시, 문자영화 등에서 보이는 문자 텍스트의 실험적 가능성을 분석한다.
플라톤, 루소, 소쉬르에서부터 옹, 데리다, 키틀러까지 음성중심주의와 문자 비판의 역사
플라톤에서 소쉬르에 이르기까지 문자는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즉 말을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는 소실(변질)되거나 침묵하므로, 문자에 대한 말의 우위를 보여주는 음성중심주의의 전통을 보여준다. 루소 역시 언어의 기원을 정념에 두고, 이성의 언어인 기록문화로 옮아가면서 어떻게 최초의 목소리 언어로서의 열정(정념)이 상실되는가를 문제삼으며 말의 우위를 강조한다. 이에 대결하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해블록이나 옹과 같은 구술문화 연구자들의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데리다가 행한 문자에 초점을 맞춘 연구이다. 옹은 문자가 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데리다는 말이 문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이들의 연구는 말과 글의 우위 비교를 떠나 구술적 이야기와 대등한 지위를 갖는 문자 연구에 관한 객관적 기술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저자는 두 입장 모두 문자와 말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 속에서 각각의 기원과 상호연관성을 추적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동시에 저자는 데리다가 사용한 문자 개념과 일반적 문자 개념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본격 문자이론 연구로 보기는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구술성과 문자성의 틀을 벗어나 음성중심주의의 형이상학적 특성을 폭로하고 말에 대한 문자의 우위를 성찰하게 한 데리다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또한 악보나 무용보 같은 기록체계로서의 문자적 특성에 주목해 말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 문자체계를 강조한 넬슨 굿맨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문자를 언어와 결별시키고 독자적인 매체의 영역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평가한다.
문학 영역에서 보자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독문학사에서도 언어가 현실을 재현할 수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언어의 위기가 거론된다. 그러한 성찰의 시발점이 된 호프만스탈의 「찬도스 경의 편지」(1902)에서부터 언어의 물질성에 주목한 독일 작가 아르노 홀츠, 구체시에 이르는 언어실험은 문자가 지닌 매체적 특성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반응의 산물이다. 이후 문학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키틀러가 그 위기를 예견했듯 매체의 발달이다. 가령 사진이나 리얼리즘 회화 등이 문학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매체 비교를 통해 순수하고 절대적인 문학 매체의 지위가 사라지면서, 문자 텍스트의 매체적 특성과 더불어 그 고유한 법칙과 논리에 대한 연구가 촉발된다. 그뿐 아니라 타매체와의 비교에서 문자 텍스트가 지닌 전망을 예측해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플루서는 매체의 발전을 이차원적인 그림, 일차원적인 텍스트, 영차원적인 기술영상(컴퓨터)의 순으로 배열하면서 이러한 발전의 필연성을 예고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플루서의 생각 역시 문자의 형상성이 갖는 이차원적 특성은 간과했음을 지적하면서, 매체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문자의 지위 역시 변화했으며 종이를 벗어난 문자의 삼차원적 특성의 가능성을 주목한다. 즉 기술영상시대의 문자의 몰락을 예고한 플루서의 비관적 예측을 넘어서서, 우선 문자의 고유한 특성과 그것의 ‘변화’에 대한 실험적 인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음성중심주의 전통(호프만과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과 문자의 시각적 형상성(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구체시, 문자영화를 중심으로)을 통한 작품 분석
이 책은 철학, 문예학, 언어학 등 전반에 걸친 문자 지위의 담론을 작품 적용에 앞서 놀이와 가치라는 두 범주에서 살핀다. 그림문자에서 표음문자인 알파벳문자로 넘어가면서, 의미와 가치를 축적하고 생산하는 문자의 경제학적 측면이 부각된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문자문화는 필사문화로서 여전히 구술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시각적 문자 배열에 대한 고려와 개성 있는 다양한 활자의 등장, 필사본의 희소성에서 벗어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인쇄본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15세기에 발명되어 18세기에 본격적으로 꽃핀 인쇄술은 문자를 가치의 경제학에서 벗어나 해체의 놀이로 옮아가게 한다. 이로써 대상 지시적 측면에서 해방된 문자는 스스로의 고유한 법칙과 논리를 한껏 발휘하며 유희적 기능을 실험하게 된다. 이 과정을 저자는 문학작품 분석 사례를 통해 밝혀내고 있는데, 우선 음성중심주의 전통에 따른 E. T. A. 호프만의 『황금 단지Der goldne Topf』(1814)에서 자연의 언어, 근원문자로서의 언어에 대한 추적을 시작해, 보토 슈트라우스의 『커플들, 행인들Paare, Passanten』(1981), 『마지막 합창Schluβchor』(1991), 『소요Rumor』(1980),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Niemand anderes』(1987) 등의 작품에서 현대 매체 비판에서 출발한 음성중심주의로의 회귀를 목격한다.
특히 20세기 초에 언어의 위기 내지 의미의 위기가 생겨나면서 매체로서의 문자의 형상성이 중요해진다. 저자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Extremely Loud & Incredibly Close』(2005)이라는 미국 현대소설 속에서 문자 텍스트가 완전히 시각적 이미지로 화하여 타이포그래피의 미학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문자를 가지고 유희하는 텍스트들의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문자의 계산적 특성, 효과적 배열을 고려한 문자의 연산적 특성이 재조명된다. 이는 디지털 문자에서와 같이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 계산과 놀이가 결합한 새로운 문자 유희를 보여준다.
저자는 구체시 이전의 실험시로서의 괴테와 쿠르트 슈비터스,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시작품 비교를 통해 읽기를 넘어선 보는 시로서의 가능성을 점친다. 더 나아가 문자의 단순한 의미 생산을 넘어선 해체를 통해 공간적 구성을 고려한 텍스트의 형상과 배치 내지 조직에 집중한 시작품을 참조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빈그룹과 슈투트가르트그룹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구체시에서 극명하게 조명된다. 즉 이차대전 후 전위예술가들의 아트 클럽에서 생겨나 1954년경 아르트만H. C. Artmann의 영향하에 본격화된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집단인 빈그룹Wiener Gruppe의 음성시가 그것이다. 또한 1950년대 후반 막스 벤제Max Bense를 중심으로 형성된 슈투트가르트그룹Stuttgarter Gruppe의 라이하르트 될, 헬무트 하이센뷔텔, 프란츠 몬, 에른스트 얀들에게 주목해 구체시에서 드러난 문자의 형상성을 이야기한다. 주요한 일례로 오이겐 곰링거의 시작품에서 문자의 물질성을, 클라우스 브레머 등의 시작품에서 문자의 운동성을 도출해낸다. 이에서 끝나지 않고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오늘날 문자로 구성된 영상이미지를 보여주는 프린스, 밥 딜런의 뮤직비디오에서부터 알렉스 고퍼의 뮤직비디오 <아이>와 제임스 쇼의 뉴미디어아트 <읽을 수 있는 도시> 등의 주요 작품을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드는 ‘문자영화’와 연관시킴으로써 새로운 기술매체 시대의 문자의 실험적 가능성을 예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