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을 통해 문화의 의미를 되묻다
세기의 라이벌들이 일군 동시대 문화 스펙트럼
20세기에 ‘디자인’이라는 옷을 입고 세상에 태어난 물건들, 그리고 그것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만화라는 큰 틀 안에서 캐리커처라는 형식으로 소개했던 김재훈의 세 번째 책이 출간됐다. 이번에는 디자인에서 외연을 넓혀 순수예술, 대중문화, 클래식까지 종횡무진 한다. 방식 또한 각 분야에서 두 각을 나타낸 인물이나 집단(밴드 등) 혹은 작품이나 사물을 둘씩 짝을 지어 각각의 특성과 차이점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을 취했다. 제목인 ‘라이벌’ 혹은 ‘VS’ 형식이라는 말로 이번 책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이 말했듯 “훌륭한 라이벌을 가진 것보다 더 좋은 창조의 원천은 없다.” 겉으로는 경쟁 상대지만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동지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라이벌’의 정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문화의 꽃을 피워낸 20.21세기 문화 영웅들의 경쟁을 통해 오늘날 문화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어떤 창조적인 힘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두 67쌍의 라이벌들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다양한 동시대 문화의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대상의 특징을 극대화시켜 표현한 그림과 짧은 글 속에 역사와 특징을 집약해 넣는 촌철살인의 글 솜씨다. 만만치 않은 정보와 지식을 킥킥대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간결한 그림과 말풍선 속에 20·21세기 문화 지도가 꽉꽉 들어차 있다.
촌철살인으로 그린 20.21세기 문화지도
경쾌한 색채와 재치 넘치는 말풍선 대사들로 이뤄져 있지만,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문화는 뭘까? 이야기 소재를 디자인에서 문화로 넓히기로 결정한 다음 가장 먼저 자문해 보았던 것이 이 단순하면서도 답하기 까다로운 물음이었다. 문화는 정원에 피는 꽃과 같다. 딱히 먹을 양식을 마련하거나 내다 팔기 위해 꽃을 심는 것이 아니라 생업과는 별도로 삶을 충전하려고 꽃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꽃이 상품이 되면서 그 순수한 희망과 기쁨은 사라졌다. 문화의 가치는 이제 더 이상 진·선·미가 아니라 이윤 혹은 부가 가치를 위한 이미지 기능이다.
이런 마당에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히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지난 시간 동안 가장 화려한 빛깔로 피었던 꽃들, 즉 괄목할 만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던 유명한 사례들을 라이벌 형식으로 소개하는 이 책은 한편으로는 그 치열했던 경쟁들이 자본주의 기관차와 함께 달려온 무한 소비의 선로에 남겨 놓은 추억을 되살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_「책머리에」에서
즉, 67쌍의 라이벌들로 우리는 괄목할 만한 성취를 보지만, 지은이는 그것이 문화가 자본과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의 성과라고 본다. 예를 들어 샤넬의 ‘리틀 블렉 드레스’는 애초에 값비싼 상품이 아니라 여성복의 혁명이었고, 요즘에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북유럽 의자 디자인의 거장 야콥센의 의자도 애초에는 값싼 재료로 군더더기 없는 기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라이벌』에서 다룬 문화 영웅들이 이룬 괄목할 만한 성취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문화가 태어났을 당시의 추동력과 사회와의 접점을 우리가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은이는 이 67쌍 라이벌들을 비교하고 가상의 경쟁을 시키면서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지만 캐리커처로 그린 이미지와 짤막한 대사들에 풍자도 섞어 놓아 오늘날의 문화 현상에 대해 좀 더 생각할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재미있게 즐기는 가운데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고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자극을 준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의 내용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아이콘’적 지위에 오른 이들을 다룬다. 메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존 웨인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또 가상의 존재로서 슈퍼맨과 배트맨, 셜록 홈스와 아르센 뤼팽 등이 한 쌍을 이뤄 각자 아이콘적 지위에 오르게 된 이유를 자랑한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잡스의 경우 디자이너로서의 면모와 CEO로서의 면모를 대조시켜 보여준 점이 재미있다.
2장에서는 디자인과 시각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 혹은 (올림픽 같은) 사건을 다룬다. 아르누보의 두 거장 알폰스 무하와 오브리 비어즐리, CI디자인의 아버지 폴 랜드와 영상 타이틀 디자인의 대가 솔 바스 등이 자웅을 겨루고, 한글 활자 디자인의 바탕을 다진 최정호와 한글 창제 원리에 입각해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한글 서체를 제안한 안상수, 캘리그래퍼 강병인과 전각가 정병례, 팝아트 작가로서 ‘키치’ 미술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각자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진 클래스 올덴버그와 제프 쿤스 등이 짝을 이뤄 가상의 경쟁을 펼친다.
3장에서는 상품 디자인과 패션 디자인을 다룬다. 애플 컴퓨터의 언어를 디자인한 수전 케어와 겉옷을 디자인한 하르트무트 에슬링거, 스포츠 브랜드의 양대 산맥인 아디다스와 나이키, 여성복을 혁명한 샤넬과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브 생로랑, 독일의 국민차 비틀과 영국 대중을 위한 차 미니, 럭셔리 자동차 디자인의 아버지 피닌파리나와 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자동차를 디자인한 주지아로 등이 짝을 이룬다.
4장에서는 SNS서비스, 잡지, 영화 등 대중매체를 다룬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한 쌍을 이루며, 그 외에도 『하퍼스 바자』와 『보그』, 한국 잡지의 전설 『샘터』와 『뿌리 깊은 나무』, 여름이면 블록버스터 영화로도 만날 수 있는 미국 카툰의 명가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 등이 각자의 우월함을 자랑한다.
5장은 클래식이다. 카라얀과 클라이버, 오르먼디와 라이너, 번스타인과 첼리비다케 등 쟁쟁한 지휘자들이 각자의 음악세계를 뽐내며,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 조수미와 디아나 담라우 등 프리마돈나들의 강점과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카르멘>과 <마농 레스코>, <나비 부인>과 <미스 사이공>을 비교하는 등 음악 작품에 대한 소개 또한 빼놓지 않았다.
각 장의 말미에는 각 장의 주제에 대해 지은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짧은 에세이로 수록해뒀다. 문화에 대한 지은이의 개인적인 생각이 더 잘 드러나 있는 글들이어서 흥미롭게 읽힌다. 책의 끝머리에는 이 책을 쓰면서 지은이가 참고한 책들, 좀 더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 읽으면 좋을 책들의 목록과 짤막한 감상을 덧붙여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