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8개국 21개 도시, 42개 공연장에서 보낸 365일
한국인들의 해외여행 경향은 동남아 패키지여행에서 시작해 어느덧 유럽의 테마 여행으로 깊어지고 있다. 단순히 여행지의 풍광을 즐기고 오는 데서 벗어나 음악과 공연, 미술과 요리까지 우리의 관심사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클래식 팬이라면 여행 중에 음반과 DVD로만 접했던 최고의 공연장과 명지휘자.연주자.가수의 공연을 실제로 접해보고 싶은 소망을 품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그러자면 적잖은 시간과 예산을 들여서 큰맘을 먹고 여행에 나서야 하지만, 다른 여느 분야와는 달리 공연 관람을 목적으로 한 여행에는 여러 가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들의 시간대와 우리의 생활대가 다른 데서 생겨나는 물리적 시차(時差)와 우리 음악계와 본토의 음악계 사이의 온도차가 어쩌면 클래식 여행객의 덜미를 잡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지은이는 1년이라는 시간을 허락받아 이런 어려움들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단기간의 여행객이 꿈꾸기 힘든 클래식 기행의 대장정에 나선다.
유럽의 공연 시즌은 보통 가을에 막이 올라서 이듬해 6월 즈음 끝나고, 여름휴가 기간에는 축제로 이어진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정확히 1년 동안 지은이는 연주회와 리허설, 마스터클래스와 강좌까지 유럽 8개국의 21개 도시, 42개 공연장에서 176편의 공연을 지켜보면서 그 환호와 감동, 숨소리와 눈물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했고 마침내 ‘마음속의 유럽 음악 지도’를 실제로 짚어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접하는 공연들은 대개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교향곡과 협주곡을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클래식 팬들은 암묵적으로 취향의 편식을 강요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지은이는 유럽에서 온전하게 한 시즌을 보내면서 지갑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시간과 장소, 프로그램과 연주자까지 최대한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지은이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되도록이면 객원 지휘자보다는 상임 지휘자가 출연하는 공연을 관람하고, 오케스트라나 극장의 매력과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연주회를 고르며, 기존에 손쉽게 볼 수 있었던 레퍼토리보다는 되도록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 때문에 파리를 베이스캠프로 삼았음에도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공연할 때까지 반년 이상을 기다렸고,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힌데미트와 쇤베르크의 작품을 고르기도 한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도 가까운 도시와 공연장은 함께 묶어서 방문하는 편이 현명했지만, 이 같은 원칙에서 어긋날 경우에는 같은 도시라도 수차례 다시 찾았다. 베를린과 뮌헨, 런던과 빈 등 주요 도시를 찾아간 기간이 각각 다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전통과 혁신이 교차하는 유럽 음악당
이렇게 365일 동안 유럽 공연장을 순례하면서 지은이는 극장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이요, 전통과 혁신이 교차하는 공간이라는 걸 확인한다. 지은이는 유럽의 연주회장을 다니면서 역설적으로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껍데기’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고 주민들의 문화 향수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화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에서 공연장을 앞다퉈 짓고 있지만, 아직은 콘텐츠 생산보다는 건물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유럽의 여러 공연장들의 역사와 그 역사가 낳은 콘텐츠를 지키는 것은 물론 풍부하게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공연장 역시 철저하게 역사적 산물이다. 서양 고전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청중이 점차 노령화하고 젊은 관객은 급감하는 현실 속에서 고전 음악이 자칫 사회로부터 단절, 유리되지나 않을까 고심이 적지 않다. 인터넷과 디지털의 세계에 뛰어들고, 청소년의 예술 체험 교육을 강화하며, 삶의 현장에 직접 다가가는 음악회가 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의 현재는 어쩌면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영역에 속했던 공연장이 21세기를 맞아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도 살펴보려 했다.
겉핥기식으로 “왔노라 보았노라”만을 나열하거나 개인적인 감상을 구구절절이 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지은이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각각의 음악당이 세워진 유래,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알게 되며 그러다 보면 유럽 클래식 음악의 역사와 함께 현재 유럽 클래식 음악계의 상황까지 넌지시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클래식 감상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지은이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몸소 체득한 소중한 정보를 나눠주기도 한다. 유럽의 공연장은 여전히 온라인 관객보다 오프라인의 홈 팬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기 때문에 “유럽에서 공연 티켓을 싸게 사고 싶다면 가장 빨리, 되도록 현장에서, 여러 티켓을 묶어서 사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는 그저 한 문장에 지나지 않지만 지은이의 발품과 지갑을 털어서 알아낸 정보이다. 또한 각 글의 말미에 실제로 공연장에 찾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을 정리해둔 것도 스스로 유럽 클래식 기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