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으로 폭넓은 사랑과 지지를 받아오며 2009년 『1Q84』로 다시 한번 국내에 열풍을 일으킨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본업은 당연히 소설가지만 오래전부터 꾸준히 그의 작품을 읽어온 독자라면 안자이 미즈마루의 재치 넘치는 삽화가 들어간 에세이 시리즈를 기억할 것이다. 하루키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리즈로 꼽은 이 에세이가 국내 정식 출간 계약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소설에서 엿보이는 것과는 또다른 생활인 하루키의 면모는 물론, 1980년대의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정취와 도시 생활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다.
북디자인, 광고, 만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랜 지인으로, 하루키가『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재즈 카페를 운영하며 습작을 하던 무렵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또한 「빵가게 습격」을 비롯한 하루키의 단편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캐릭터 ‘와타나베 노보루’는 다름아닌 그의 본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막역한 사이이니만큼 이 둘이 각 작업물에서 보여주는 환상적인 호흡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터. 특히나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터치의 에세이와 심플하고도 손맛이 살아 있는 삽화의 조화로 유명한 ‘무라카미 아사히도’ 시리즈는 1980년대 중후반에 걸쳐 각종 지면에 연재된 이들 콤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리즈에 속하는『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에, 두 사람의 첫 공동 작업물인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그리고 약 반년에 걸친 공장 탐방기를 엮은 『해 뜨는 나라의 공장』을 더해 총 다섯 권의 걸작선이 완성되었다.
지금껏 주로 여러 책에서 일부를 발췌해 엮은 앤솔러지 형식으로 발간되어 아쉬움을 주었던 기존 판본과 달리, 문학동네에서 정식 계약을 거쳐 발간하는 이번 걸작선에서는 모든 내용과 삽화를 원서의 차례에 맞춰 싣고 컬러 삽화까지 충실히 재현해냈다. 또한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에서는 아직 국내에 발표되지 않은 에세이들도 만나볼 수 있다. 소설가로 만개하기 직전 30대 중후반의 젊은 하루키의 생각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집들은 그의 오랜 팬에게나 막 입문하려는 초심자에게나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다.
앤디 워홀이 발행인이었던 잡지 <인터뷰>는 한때 세상을 ‘OUTSKE(뒤쳐졌다)’와 ‘INSVILLE(앞서간다)’로 나누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마리화나’ 대신 ‘아스피린’을 먹는 것이 더 앞서가는 것이며, ‘뉴욕 양키즈’ 대신 ‘뉴욕 메츠’, ‘뉴욕 타임스’보다는 ‘월스트리트 저널’를 읽는 것이 신식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분류하자면 2012년 7월 나른한 오후 세 시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것은 ‘뒤쳐졌다’와 ‘앞서간다’의 어디쯤에 있는 걸까.
집에서 편도로 한 시간 반 거리의 한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택시나 철도 파업처럼 평상시와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에스콰이어>나 <루머>에 실리는 가십들의 행간을 읽는 무라카미 씨는 하루에 튀긴 두부를 세 모나 먹는다는 인터뷰 기사 때문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던 자신의 일상을 소소히 털어놓는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나는 이런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무더운 여름, 휴가를 떠나기 직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것, 그것은 내게 점심 하면 ‘평양냉면’, 야구 하면 ‘두산’, 매니큐어 하면 무조건 ‘장밋빛’인 세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