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에 전사 아닌 사람 어디 있어?
전사 아니면 거지인 게 소말리아지!”
탄탄한 구성과 안정된 문장, 거침없는 전개와 폭깊은 내공으로 무장한
신인 작가 하상훈의 첫 장편소설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은 공동수상으로 결정되었다. 확연하게 다른 색깔의 젊은 소설을 독자들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하상훈의 『아프리카의 뿔』은 “가장 모범적인 장편소설”이라는 평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소말리아 이야기를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풀어놓는 이 새로운 젊은 소설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하상훈씨의 『아프리카의 뿔』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대학생으로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의 스케일이 크고 주제가 묵직하다는 미덕 때문이었다. _윤대녕(소설가)
“아프리카의 뿔”은 에피오피아, 소말리아 자부티가 자리잡고 있는 아프리카 북동부를 가리키는 말로, 이곳의 지형이 마치 코뿔소의 뿔과 같이 인도양으로 튀어나와 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소설은 “짙은 안개에 달도 보이지 않는 밤”, 먹빛 바다 한가운데 만신창이가 되어 떠 있는 유조선을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토록 먼 곳을 배경으로, 이토록 낯선 인물들이 중심이 된 소설을 우리는 일찍이 만나보지 못했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강대국의 지배 욕망에 의해 약소국이 일방적으로 피해자로 전락하거나 경제적으로 이용되는 현실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미덕 가운데 하나다. 미국 군함이 인질들이 타고 있던 동일13호를 공격하고 나서 소말리아 해적의 소행으로 둔갑시키는, 작품의 절정 부분에서 이 점은 더욱 치밀하게 드러난다.
원양어선 동일13호를 추격, 납치하면서 전개되는 소말리아 해병대의 해적 활동은 몇 년 전 실제로 우리나라 어선 동원628호 피랍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선원들이 겪은 고초가 아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인질로 잡힌 선원들의 비참한 시간을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원양어선 납치라는 국제관계 속에 우리의 현실이 끼어들어가고 있음을 혹은 거기에서 우리의 어떤 현실이 은폐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또다른 관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_권희철(문학평론가)
소설의 초반부에 AK소총을 거머쥐는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열여섯의 소년 모하메드. 낫 한 자루를 쥐고 처음 바다로 나온 후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부상당한 친구와 인질들을 구출하는 그가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주체이다.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희망에 부풀어 소말리아 해병대에 들어온 모하메드는 소말리아를 지키는 해병대와 다른 배들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해적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모하메드의 시선과 심경의 변화를 따라 읽다보면, 이 작품은 가장 절박한 상황에 처한 한 소년의 처절한 성장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글로 씌어진, 소말리아 해병대와 그 속에서 갈등하는 열여섯 소년의 이야기. 물론 심사 과정에서 이렇듯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아프리카의 뿔』은 그것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말을 빌리면 “이제 한반도 내의 사건들과 역사들을 관찰하려는 소설적 시야가 협소하다고 느끼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음을 여기서 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공위성의 높이에서 지구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실을 더 큰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해적단의 지난한 모험을 세계 정세에서 소외된 변방의 이야기나 역사의 일부로서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환원해낸 솜씨가 매력적이었다. _편혜영(소설가)
망망한 인도양, 그 낯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안이 눈앞에 펼쳐진 듯 한국의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무엇보다 각 인물들의 살아 있는 것처럼 형상화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이십대 대학생이 소말리아 해적들을 그토록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치밀한 자료조사의 힘이다. 해적 이야기를 써보겠다 마음먹은 작가는 소말리아 해적들에 관한 책과 신문보도 등을 공부하듯 읽어내려갔고, 그의 노고와 공력은 탁월한 이야기꾼의 자질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결코 적지 않은 각각의 인물들은 작가의 애정 속에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부여받아 저마다의 색을 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두 달여 간 이들이 탄 동일13호는 “인간사의 생존과 죽음, 갈등과 음모, 탐욕과 이기가 한데 버무려진 매력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모하메드의 성장담은 “머나먼 소말리아 해적단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역사와 거대 권력의 모략 앞에서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인이라는 것에, 그러므로 주변국 정세에 휘둘리고 강대국 논리에 좌우되는 우리나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바로 볼품없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에 수긍하게 된다”(편혜영)는 평을 받았다.
이십대의 대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책 한 권의 분량으로 솜씨있게 다루어낸다는 것 자체가 내겐 경이로웠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재능과 집중력이라면 그의 작가로서의 밝은 가능성을 점치기에 충분해 보였다. _서영채(문학평론가)
누구나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무기를 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당장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면 옆집에 가서 훔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얘길 하고 싶었어요.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얘길 하고 싶었어요. 정해진 원칙이 있고 그다음에 삶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삶이 먼저 있고 윤리가 있다는 생각. 그런 맥락에서 소말리아 해적을 다루게 된 것 같아요. _「수상작가 인터뷰」에서
만화 <원피스>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나오는 약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해적과, 반대로 뉴스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사는 흉악한 해적. 이 양 극단에서 불만을 가졌던 작가는 직접 해적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자신을 닮은 주인공을 텍스트로 만나고 싶다는 꿈에서 시작된 소설 쓰기는 그 시야가 점점 넓어져 삶과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인도양의 망망대해도 그의 이야기를 품기에 전혀 멀고, 넓은 곳이 아니다.
여기에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형상화해내는 내공과 탄탄한 구성, 안정된 문장력의 기본기까지 충실히 준비되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성실함까지…
“작가적 자질에 있어서 한 치의 의심도” 가질 수 없게 하는 이 무서운 신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 수상소감
1월 17일 월요일이었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열람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전화를 끊고 로비를 서성거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옆 정수기에서 물도 조금 마셨던 것 같습니다. 열람실로 다시 들어가 가방을 쌌습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며 핸드폰을 들었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곧이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급한 마음 탓에 누구와도 오래 통화할 수 없었지만 누구에게든 전화를 하지 않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홍대입구로 가야 하는 2호선 지하철은 왕십리에서 건대를 넘어 강변, 잠실까지 달려갔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채 저는 핸드폰을 붙들고 무언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될 거라곤, 그러니까 문학동네 편집부장님이 “소설가 명함 하나 만들어줄까요?”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등단을 준비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시험처럼 점수가 매겨지는 게 아니라서 내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더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습작이라는 게 비생산적으로 생각되기 쉬운 일입니다. 열람실에 연습장 하나 끼고 앉아 하루 종일 상상 속에서 누군가 웃고 이야기하고 싸우는 것만 생각하다보면 어느 새 11시. 낙서와 메모가 가득한 종이 앞에 문득 허탈해지는 겁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내 글을 소설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쓴 글은 다만 사용된 종이일 뿐입니다. 그들을 놀라게 할 만한 좋은 소설을 써야지, 하지만 좋은 소설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재미가 있어야 좋은 소설일까요? 아니면 감동이 있어야 합니까? 삶에 대한 통찰이나 인류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좋은 소설인가요? 사실 전 아직 소설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 수 없고 이 길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으며 내가 걷고 있는지 뛰고 있는지 춤추는 건지 노래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종착지가 어딘지 알 수가 없는 길 위에 있던 저에게 문학동네가 말해준 것입니다. “축하해요. 하상훈군. 대학소설상을 받게 되었어요.”
아― 어쨌건 이제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토익 공부와 대외 활동, 봉사활동, 한자, 한국사, 국어능력시험, 쌍꺼풀 수술, 치아 교정 등은 조금 더 뒤로 미뤄두어도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앞인지 뒤인지 자갈밭인지 바닷속인지 모를 길을 가게 되겠지만 예전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에 대해 한 가지 아는 게 있다면 소설은 읽어줄 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많은 이들이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글을 읽고 누군가 어떤 맥락에서든 ‘좋다’라고 느끼신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하다고 인사드립니다. 바다 건너 소말리아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전합니다. 소말리아에 한 번 가본 적 없는 제가 당신들에 대해 감히 이야기했습니다. 분명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러분들을 분노케 하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리 사과의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들의 미래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참 그 저기하지마는 늘 함께해준 영화에게도 또 참 그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종종 섭섭하게 하고 둔해서 잘 모르고 때로 화도 내고 삐지기도 하고 참 여러모로 그렇고 그러하지마는 참 그게 거시기하고 그런 것이지요. 늘 고맙고 응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