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200편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죽기 전까지 예쁜 동시집 한 권에 싣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한 가지 소망은 들어주시겠지요.”
1967년 3월 5일 서른한 살의 권정생 선생이 일본에 있는 형수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이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의 안상학 사무처장이 2011년 일본에 살고 계신 선생의 형수를 방문해 찾은 이 편지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편지이다. 시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이 편지는 선생께서 두 번의 큰 수술 끝에 의사로부터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때 썼다. 목숨의 심지가 줄어드는 때에, 권정생 선생은 소망을 담아 동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손수 동시들을 묶은 것이 바로 『동시 삼베 치마』이고, 이 책은 지난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오늘, 선생의 동시집 『동시 삼베 치마』를 더 많은 어린이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해독하기 힘든 사투리를 알기 쉬운 시어로 바꾸고, 총 98편의 시 가운데 42편을 엄선하여,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그림을 담아 『나만 알래』라는 이름의 동시집으로 새로이 엮어낸다. ‘예쁜 동시집’ 하나 갖기를 소망했던 권정생 선생의 꿈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선생의 꿈이 성취되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선생의 높고 맑은 뜻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면 좋은 동시를 쓸 수 있는 분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같은 편지에서 선생은 기쁜 소식도 한 가지 전하고 있다. 동시 2편이 『기독교 교육』 문예란과 김동리가 발행하던 『아동문학』에 선평과 함께 실렸다는 소식이다. 어린이문학을 위한 지면이 귀했던 당시 사정을 고려할 때, 선생에게 이 일은 세상이 작가 권정생과 그의 글을 인정해준,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더욱 기쁜 일은 내가 쓴 동시가 2편 『기독교 교육』과 『아동문학』에 발표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평에는 ‘공부를 좀더 하면 좋은 동시를 많이 쓸 수 있는 분’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권정생 선생은 1969년 『기독교 교육』의 월간지 전환 기념 공모전인 ‘기독교아동문학작품공모’에 「강아지똥」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선생의 바른 이력은 동시인으로서의 권정생이 먼저였다는 것으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선생의 동화만이 아니라 시 세계에 대해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이때의 시들은 시기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권정생 문학의 시원이라 할 만큼의 중요성과 무게를 담고 있다.
2011년 기적처럼 우리 손에 닿은 『동시 삼베 치마』 그리고 2012년 『나만 알래』
가난과 병에서 간신히 생활이 안정될 기미가 보이자 권정생 선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당신 손으로 직접 동시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손수 종이를 자르고 그 종이에 펜으로 시를 적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풀칠을 하고 실로 꿰매 동시집을 만들었다. 권정생 선생의 생애 첫작품인 동시집 『동시 삼베 치마』였다. 50년 가까운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낡을 대로 낡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동시집. 이 시집은 평생 동시집 하나 내고 싶었던 권정생 선생의 아름다운 소망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가 지난해 우리에게 왔다. 시집 속에는, 이미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보여준 한결같은 권정생 문학과 삶의 싹이 모두 담겨 있는 예지의 시들이 들어 있었다.
대표작 「강아지똥」보다 5년 앞서 1964년에 묶여진 98편의 동시들은, 그동안 동화작가로 인식되던 작가 권정생을 시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오덕 선생의 주선에 의해 출간된 동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이 있지만, 『동시 삼베 치마』에는 권정생 문학의 원형이 그대로 담겨 있어 큰 주목과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시인 김용택 선생은 “정말 문학적으로 손색이 없는 시들이다. 동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그런 동시집이다. 나도 이 책을 놓고 공부하고 있다. 그동안 봐왔던 동시들하고는 또 다른 정말 동시다운 동시이다.”라고 했고, 유강희 시인은 “생명을 저당 잡힌 극한의 핍진 속에서도 동심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시편 곳곳에 배어 있다. 이웃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라고 했다.
반세기의 시간을 건너 아이들과 만나는 열다섯 살의 권정생
『동시 삼베 치마』에 아쉬운 것이 단 하나 있었다면, 선생이 직접 쓰고 그리고 묶은 책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안동의 사투리나 고어들까지 그대로 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펄떡거리는 안동 사투리가 살아 있는 시들이지만, 요즘 아이들이 감상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고자 했던 선생의 뜻과도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시어를 다듬는 작업이 필요했다. 또한 98편의 시가 들어 있어 한 권의 동시집에서 감상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 다시 엮은 『나만 알래』에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42편의 동시를 엄선해 실었다. 이 작업에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의 안상학 시인과 문학동네 동시집 기획위원인 안도현 시인의 밝은 눈과 무거운 손이 필요했다. 원작시의 문학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시인의 의도를 잃지 않도록 시어를 매만지고 수록시 가운데 내려 둘 것과 실을 것을 고르는 작업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반세기의 시간을 건너 요즘 아이들이 열다섯 권정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소박하고 반듯한 시와 어울리는 건강한 그림
『동시 삼베 치마』에는 권정생 선생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물감이 비싸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권정생 선생은 빨강 파랑 단 두 가지 색연필만으로 그림을 그려 동시집을 꾸몄다. 눈길을 끄는 화려함이 없고, 지나칠 정도로 소박하지만 반듯한 마음이 담긴 그림들이다.
『감기 걸린 날』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학교 가는 날』의 그림작가 김동수는 소박하면서도 반짝이는 권정생 선생의 동심을 『나만 알래』에 잘 살려내었다. 시인의 열다섯 시절, 그 시대성을 구현하면서도 시간의 거리 때문에 시에 대한 공감을 어렵게 만들지는 않는 절묘한 그림을 그렸다. 삶이 가장 곤핍할 때 쓰였으나 삶에 대한 긍정을 잃지 않은 선생의 시들과 잘 어울리는 건강한 그림이다. 이 시집을 읽는 아이들 또한 건강한 긍정으로 채워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