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문학인가,
어째서 문학인가
그 쓸데없는 물음에 관하여
이 책은 『비루한 것의 카니발』(2001) 등을 통해 우리 문학계에 문제적 담론들을 생산해냈던 동국대학교 황종연 교수가 1997년부터 2011년까지 계간 『문학동네』『현대문학』 등에 발표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저자는 역사라는 메타서사 속에 묻혀 있던 인간의 욕망이 지면 위로 대두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달라진 위상을 짚어보고, 바타유가 언급한 ‘역사가 끝나버려 할 일이 없어진 인간이 가진 부정성’, 그 쓸데없는 부정성을 포용하기 시작한 우리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으며, 또한 문학이 문화 생산자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오늘날 문학의 나아갈 바가 어디이며 그 효용성은 무엇인지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 속에 발현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가라타니 고진 비평부터 고은의 민중-민족주의 비판까지, 한국근대소설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김동인부터 2000년대 파격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인 편혜영의 소설 「저녁의 구애」까지, 시공간을 넘나들며 한국문학의 유의미한 지점마다 출몰한다. 또한 장구한 우리 문학의 흐름 속에서 근대성과 세계화라는 우리 문학이 놓쳐선 안 되는 문제와 함께 당대의 문제적 작품들을 세심하게 살핀다.
그중 고려대학교 김흥규 교수와 저자가 벌인 통일신라 담론은 매우 흥미롭다. ‘통일신라론’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고안된 것이며 이를 국내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김흥규 교수의 비판을 저자가 원전 해석과 지적 엄밀성의 결여라고 반박하며 쟁점화된 이 논쟁은 근대를 이해하는 다양한 시각의 중층성을 읽을 수 있는 단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윤선태와 나의 통일신라론을 공격하며 사용한 “식민주의의 특권화”는 여기서도 핵심어구다. 김철이 식민지시대 조선학의 발생에 있어서, 그리고 내가 한국민족문학론의 발생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가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고 보고 있는 것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는 김철과 나 모두에게 민족주의를 “일본제국주의의 종속적 파생물”로 보고 있다는 혐의를 걸었다. 김철과 내가 “제국주의-식민주의를 발광체로 놓고 피식민자를 반사체로 가정하는 논법”을 취함으로써 한국근대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이해를 오도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250~251쪽)
1990년대 이미 근대문학의 종언을 고하며 문학의 시대가 끝난 이치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글을 통해, 한국에서 근대문학이 정말 끝났는지 고찰하는 저자의 모습도 퍽 인상적이다.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획득한 특질들에 대한 정교한 이해와 그것들의 쇠락에 대한 명철한 판단에 근거한 가라타니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더욱더 광대한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문학의 가치를 확신하는 수전 손택,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수요가 남아 있음을 주장하는 김우창의 글 등을 통해 잔존하는 그리고 신생하는 문학의 생명력에 찬사를 보낸다.
절박하게 필요한 정치적 실천에 비추어 간혹 멸시하는 듯한 어조로까지 문학에 관여하는 행위의 의의를 부정한 그의 발언에서 반성의 압력을 느낀 비평가는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종언론에 대한 한국측의 공통된 반응은 그가 말한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은 한국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학의 정치화가 끈질긴 관행으로 남아 있는 한국의 실정을 고려하면 그것은 어쩌면 옳은 진단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새로운 유행 중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지 근대문학이 끝나버린 증상이나 아니면 끝난다는 징조에 해당하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문학은 아직 하찮은 짓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바람직한 것은 근대문학의 어떤 이상을 고집하며 문학 집단들의 무능과 타락을 고발하거나 아니면 근대문학의 어떤 자질이 한국문학에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부심하는 일이 아니라 근대문학 이후에도 문학이 존재할 이유를 생각하는 일이다. 사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사태 앞에서 문학의 잔존하는, 신생하는, 또는 변함없는 의의에 대한 믿음을 표시한 예는 문학의 묵시록 못지않게 많다. (17~18쪽)
“모든 것이 조각나서 흩어진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순전한 무질서가 세상에 풀려나왔다” _예이츠 「재림再臨」 중에서
2000년대 이후 문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념의 가치가 혼재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민주주의가 성장하는 시민사회 속에서 저자는 기존의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어오던 민중-민족 문학(고은 「만인보」)을 향해 “집단 내에서의 역할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성 속에서 존엄하다고 느끼는 인간 유형에 대해 무심하다. 오히려 개인의 관점에서 한국인을 탐구하고 이해할 여지를 차단하고 있다”(89쪽)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것에 대한 어떤 감각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대체로 동의보다 반감에 가깝다”(172쪽)는 박민규 세대 젊은 작가들의 마이너리티, 입신출세의 서사 부정 등을 담담히 읽어낸다. “깊은 환멸과 적의의 언어로 사회경험을 이야기”(191쪽)하는 박민규, 이기호, 백가흠의 소설에서 “탈중심화 사회에 내재하는 화합과 적대, 결속과 분해 양쪽 모두에 충실한”(196쪽), 민주화시대에 느꼈던 정치적 환멸을 관통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정치적 상상력”을 고대한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한반도라는 국지성을 벗어나 “통국가적 정체성을 기술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 형식과 주제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다”(489쪽). 민족주의로부터 이탈이 활발했던 지난 10년 동안 한국문학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개인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펼쳐내는 개인주의적 심성구조를 더욱 다채롭고 공고히 하며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동시대 한국소설을 보면 한국 국민문학의 담론적 구성의 핵심을 이룬, 그리고 한국문학 텍스트를 쓰고 읽는 조건을 형성한 양극들의 한 조합이 해체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민족(국가)적/세계(시민)적, 리얼리즘적/모더니즘적, 고급/저급이라는 조합이 그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대립적인 그 자질들은 내가 논의한 텍스트의 대다수에 전체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 공존한다. (4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