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발 유머 하드보일드 액션!
탐정은 아직도 바에 있다!
함박눈 내리는 삿포로 스스키노 거리의 바 ‘켈러 오하타’에 코트의 깃을 세우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사내가 들어선다. 그가 카운터 자리에 앉자, 바텐더는 위장약 상자와 물 채운 텀블러, 위스키 더블 잔을 재빠르게 대령한다. 남자는 말없이 위장약을 입속에 털어 넣고,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단번에 넘긴다. 그는, “저녁이 되어 막 문을 연 바를 좋아하는” 이 남자는, 삿포로 스스키노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토박이 ‘탐정’이다. 밤이 무르익고, 카운터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주뼛주뼛 다가와 탐정에게 말을 건넨다. “여자친구가 행방불명입니다.” 탐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어수룩한 남자를 스캔하고, 과연 탐정답게 촌철살인의 질문을 던진다. “……예쁘냐?”
『탐정은 바에 있다』에서 사라진 여대생을 찾기 위해 눈 내리는 스스키노 거리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그 탐정이 돌아왔다! 삿포로 어느 뒷골목에서 벌어진 살벌한 살인사건을 비정한 시선으로 그리면서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소와 폭소를 유발했던 명물 탐정 ‘나’의 이야기,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바에 걸려온 전화』가 2012년 1월 출간됐다. 이 작품은 오는 1월 26일부터 시작되는 제8회 일본영화제에서 부산 개막작으로 선정된 〈탐정은 바에 있다〉의 원작소설이기도 하다.
때로는 하드보일드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탐정은 바에 있다』에 이어 『바에 걸려온 전화』에서도 탐정의 면면이 과연 하드보일드의 탐정으로서 적절한가에 대한 유쾌한 토론이 이어질 듯하다. 탐정 ‘나’는 기존의 탐정들과는 사뭇 다르다. 일단 외양으론 야쿠자와 구분이 가지 않고, 도박과 게임을 너무 좋아하는데다, 세상 사람을 ‘미인’과 ‘기타 등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편협한 사고를 지녔으며, 정체 모를 괴한에게 죽도록 얻어터져 자기 토사물로 집 안이 범벅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 청소란 걸 하지 않는 위인이다. 명석하고 깔끔한 필립 말로하고는 영 다른, 왠지 골목에서 코흘리개 모아놓고 잡스런 무기 자랑할 것 같은 동네오빠 분위기다. 그러나 매일 밤 바에서 위스키를 밥처럼 몸에 흘려 넣는 탐정이다 보니, 종종 거나하게 취해 스스키노 밤거리를 기분 좋게 돌아다니다 가끔 본의 아니게 정의의 기사 노릇도 한다. 주로 취객이나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는 여성을 보았을 때다. 발차기를 날리고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고 머리통으로 턱을 박살낸다. 그러고는 덜덜 떠는 ‘미인’에게 단골 바의 성냥을 건네며 “내가 필요하면 연락해!” 한다. 술이 깨고 나면 누구에게 성냥을 줬는지 기억도 못 하지만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의 명함(성냥에 이름과 계좌번호를 적은 것)을 꺼내 들고 탐정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에 그가 맡게 된 사건은 시작부터 묘한 냄새를 풍긴다. ‘곤도 교코’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여성이 어느 밤, 바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알려주는 남자들을 차례로 만나 몇 월 며칠 어디서 무얼 했는지 질문하고 그의 반응을 살펴달라고 의뢰한다. 탐정은 목소리만으론 왠지 ‘미인’일 것 같은 여자의 의뢰를 거절하지 못하고 이후 차례차례 남자들을 만나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전철 승강장에서 바닥으로 떠밀리는, 싸움 좀 하는 탐정으로서는 여간 수치스럽지 않은 곤혹을 치르게 된다. 일을 당하면 반드시 열 배로 복수한다는 생의 철학을 갖고 사는 탐정은 이후 시키지도 않은 일에 자발적으로 뛰어다니며 그들의 뒤를 쫓고 내막을 캐면서 스스키노 거리에서 일어난 얽히고설킨 비정한 ‘살인사건들’의 진상을 파헤치게 된다.
우익 비판, 기업과 폭력조직 유착 고발,
약자 울리는 세태 꼬집는 사회파 미스터리
탐정 ‘나’는 수수께끼의 여인 ‘곤도 교코’의 이어지는 의뢰를 수행하면서 그녀가 던져준 몇 가지 조각으로 퍼즐을 완성해가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부터 쓴다. 무턱대고 사람을 미행하고, 조직에 쳐들어가고, 불쑥불쑥 질문을 던지다가, 쫓기고 맞고 구르고 토하고 또 쫓기고 맞고 구르고 토하고 한다. 텅 빈 빌딩에서 일어난 방화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한 여인의 소사체,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던 열일곱 살 소년의 석연치 않은 죽음, 그리고 몇 달 후 거리에서 위험에 빠진 여인을 구하려던 한 실업가의 안타까운 횡사…… 이어서 탐정이 뒤쫓던 한 조직원까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탐정의 들쑤심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이 사건들이 사실은 하나의 도화선에 연결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단번에 클라이맥스로, 또한 삿포로발 유머 하드보일드는 단번에 비정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옷을 갈아입는다. 반사회적인 우익단체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진 젊은이, 비겁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온 변절한 실업가, 또 그런 기업에 기생하는 조직들과 그들에게 내몰리고 협박당하고 끝내 목숨까지 잃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가족들의 남은 사연까지, 『바에 걸려온 전화』는 1편보다 훨씬 강력해진 사건과 촘촘해진 구성으로 마지막까지 긴장을 이어가게 만드는 매력을 선사한다. 마지막에 가서 드러나는 수수께끼 의뢰인 ‘곤도 교코’의 정체와 그녀의 긴 고백은 진한 비극의 향기를 풍기며 최후의 반전을 장식한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한발 늦게 도착한 탐정은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