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소녀가 있다. 1990년에 태어나 오롯이 ‘헤이세이(1989년부터 시작되는 일본의 현재 연호)’ 시대만을 살아왔던 소녀는 중학교 3학년 봄방학 때 아버지의 업무용 컴퓨터를 빌려 삼 주 만에 완성한 장편소설 『헤이세이 머신건스』로 제42회 문예상을 수상한다.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의 와타야 리사, 『공주님』의 야마다 에이미 등 개성 있는 젊은 재능을 발굴해온 문예상 심사과정에서 2000편이 넘는 경쟁작을 물리친 15세 소녀의 이름은 미나미 나쓰. 머신건의 총탄처럼 거침없이 쏟아지는 문체로 중학생 소녀의 고민과 절망, 눈앞에서 무너지는 세계를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표현해낸 미나미 나쓰는 순문학 분야 신인상 수상자로서는 최연소였던 와타야 리사의 17세 기록을 이 년이나 앞당기며 문단과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녀에게, 세상은 너무도 불친절했다
총탄처럼 쏟아지는 新세기 하드보일드 생존법
엄마는 가출했다. 아빠는 있으나 마나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 아빠가 데려온 젊은 애인은 사사건건 내게 시비만 건다. 학교에서는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평범한 아이를 연기하며 그나마 원만히 지내고 있었지만, 사소한 오해로 함께 다니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 뒤로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집, 학교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내 꿈에는 저승사자가 나타난다. 너덜너덜한 옷차림에 식칼을 들고 강림하는 그는 언제나 내게 머신건을 쥐여주며 주위 사람들을 쏘라고 시킨다. 조건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쏘아야 한다는 것. 엄마, 아빠, 아빠 애인, 친구들, 선생님, 나는 언제나 내게 등 돌린 이들을 향해 머신건을 난사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금방 좋아지리라 생각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선생님은 흔해빠진 어설픈 조언이나 늘어놓으며 자기만족에 빠질 뿐이다. 꼴 보기 싫은 아빠의 애인까지 새엄마가 될 거라며 나를 절망에 빠뜨린다. 나는 고민 끝에 엄마를 찾아갔지만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엄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우리 사이에는 부질없는 대화만이 오고 간다……
고독과 패기, 언어를 무기로 세상에 맞서는 15세 소녀
90년대생 신인류 작가의 사상 최연소 문예상 수상작
동정 없는 세상에 부딪힌 뒤 겪게 되는 극심한 감정 기복, 스스로의 그런 내면을 자의식과잉이라 느껴질 정도로 고집스럽게 파고드는 집요함이야말로 젊은 날의 특권일 것이다. ‘사춘기라는 시기가 끝난 뒤 예전의 내 모습에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감각이 아직 선명할 때 소설로 써두고 싶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 안에는 오로지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꿈틀댄다. 부모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또래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다. 그래서 언제나 집 안 공기와 친구들의 역학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초조해한다. 누구나 열다섯 시절은 그렇다. 하지만 결국 세계는 눈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소녀에게 남겨진 것은 절망과 분노뿐. 끓어오르는 감정들과 에너지는 ‘마침표도 쉼표도 없이 논스톱으로 하염없이 계속되는 듯한’ 문장들을 통해 고스란히 분출된다. 느긋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여유 따위 없다. 꿈속에서 머신건을 난사했듯 ‘언어’라는 이름의 무기를 손에 들고 거침없이 문장들을 뱉어낼 뿐이다. 날 버린 엄마, 내겐 관심도 없는 아빠, 꼴 보기 싫은 아빠 애인, 하루아침에 나를 내쳐버린 친구들, 무능력한 선생님, 그 모두를 향해,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세상을 향해. 숨 쉴 틈도 없이 밀려드는 문장들은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부수겠다는 선언으로까지 읽힌다.
수상 직후 매스컴의 주목과 취재 세례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학업에만 전념하던 미나미 나쓰가 2010년 작품활동을 재개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녀의 행보를 주목하는 것뿐이다.
▶ 수상소감
소설은 남몰래 읽고, 남몰래 씁니다.
여름방학 숙제로 말할 것 같으면 매년 미루다 우는 타입, 대화에서는 갈구기 담당. 여자애인데도 치마를 싫어하고, ‘다이어트’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냅니다. 닥치는 대로 스티커 사진을 찍어댑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보통’입니다. 어디에나 있을 겁니다. 역 앞을 휙 둘러보고 적당히 고른 중학생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요즘, 저는 타오르고 있습니다.
저를 둘러싼 것을 깨부수고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기운, 혹은 정열 같은 것에 몸을 내맡기고 글을 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빠른 속도였습니다. 하지만 쓰는 동안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소설은 마치 타인이 쓴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동안 저 자신은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열정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많은 것들과 부딪히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초조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단단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지, 기쁠 뿐입니다.
▶ 제42회 문예상 심사평
이 작품의 매력은 한마디로, 언어로써 세상과 대결하려는 그 늠름한 ‘자세’의 아름다움이다. _다카하시 겐이치로(소설가, 문예평론가)
문장의 유려함은 누구든 연습으로 이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비단 문장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쉽게 반전되며 가냘프고도 어리석은, 때로는 끔찍한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_다나카 야스오(소설가)
저승사자를 묘사한 에피소드가 뛰어나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한 개인의 진실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_가쿠타 미쓰요(소설가)
▶ 옮긴이 전새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유년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사회사업대학을 졸업했다. 『13계단』 『그레이브 디거』 『붕대 클럽』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담당 | 박아름 (031_955_2654/invu07@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