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철학과 아이티 혁명
이 책은 두 편의 논문 「헤겔과 아이티」와 「보편사」, 그리고 각각의 논문을 위해 새로 쓴 서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의 화두를 이루는 세 항은 제목에서 보듯 ‘헤겔’, ‘아이티’, ‘보편사’이다.
우선 헤겔과 아이티 혁명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헤겔은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목격했고, 1807년 자신의 주저主著 『정신현상학』을 발표했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논의를 전개하는 것도 바로 이 책에서다. 중앙아메리카 서인도제도에 위치한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1791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804년 최초의 흑인 공화국으로 건국되었다.
헤겔은 아이티 혁명을 알고 있었을까? 이 혁명이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만약 아이티 혁명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의 저작에서 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찾기 어려울까? 더 나아가 이후의 헤겔 연구에서 누구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들에 답하기 위해 벅모스는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을 써내려가듯, 헤겔의 저작과 편지, 그가 구독했던 신문과 잡지(특히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의 역사적 사건을 심도 있게 다루었던 독일 월간지 『미네르바』), 헤겔에 관한 다양한 증언과 연구를 종횡무진하며 진실에 다가선다.
그렇게 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헤겔은 아이티 혁명에 대해 알았고, 식민지 노예제의 실상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헤겔은 왜 침묵했을까?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헤겔과 아이티의 연관’에 대해 헤겔 이후 서구 학문세계가 보인 철저한 침묵이다. 수전 벅모스는 식민주의와 노예제에 대한 서구 근대의 침묵과 망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아온 헤겔 철학은 ‘아이티’와의 연관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헤겔이었으며, 이 억압의 이면에는 헤겔만이 아니라 서구 학문 전반에서 작용하는 어떤 배제의 원리와 그로 인한 맹목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헤겔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은 이 학문적 맹목에, 더 나아가 근대적 사유 자체의 맹목에 도전하는 일이다.
헤겔의 침묵, 서구 근대 사상의 침묵
헤겔은 분명 아이티 혁명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미네르바』의 정기 구독자였던 헤겔이 1791년에 일어난 생도맹그(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섬의 예전 이름)의 혁명에 대해 몰랐을 리는 없다. 벅모스에 따르면 헤겔은 애초에 상호인정의 주제를 공동체 내의 인륜적 삶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했으나 『정신현상학』(1807)에 와서는 그 주제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그리고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투쟁과 연관시킨다. 이보다 나중에 펴낸 『법철학』(1822)에는 노예의 해방이 좀더 분명하게 “인륜적 요구”(93쪽)로 등장하며, 『주관적 정신의 철학』에서는 아이티가 직접 거론되기도 한다.
헤겔과 아이티의 연관을 두고 벅모스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헤겔이 노예 혁명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심지어 노예 혁명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구상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벅모스는 헤겔이 ‘노예’에 대해 말할 때 루소를 비롯한 유럽 계몽주의자들처럼 그 말을 하나의 은유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와 근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노예를 가리켜 사용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노예제를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만 아니면 힐난했던 그 방식”(204쪽)을 헤겔은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헤겔은 실제의 노예들과 그들의 혁명적 투쟁에 관해 알고 있었다. 그의 지적 이력을 두고 볼 때 어쩌면 가장 정치적인 표현이라고 할 만한 곳에서 그는 아이티의 그 충격적인 사건을 『정신현상학』에서 전개한 주장의 요체로 이용했다. 카리브해 연안 지역 노예들이 자기 주인에 대항하여 실제로 성공시킨 혁명은 인정의 변증법적 논리가 세계사를 관통하는 주제, 곧 자유의 보편적 실현의 이야기로서 가시화되는 순간이다. (…) 이 역사적 순간에 이론과 현실은 수렴되었다. (90쪽)
수전 벅모스가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헤겔을 무조건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벅모스는 헤겔에게 아프리카인에 대한 편견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헤겔은 『주관적 정신의 철학』에서 아이티 혁명을 언급하고 있지만 바로 같은 대목에서 흑인과 흑인 문화에 대한 인종차별적 관점을 드러내며, 아이티에서 기독교 원리에 기초한 국가를 세웠다는 데서 흑인들의 교화 가능성을 찾기까지 한다. 여러 정황과 자료로 볼 때 헤겔은 노예 해방을 지지한 급진적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흑인 문화의 고유성과 흑인의 문화적 소양은 보지 못한 ‘문화적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아울러 벅모스는 ‘헤겔의 침묵’을 지적한다. 그가 아이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1791년부터 건국 이전까지 진행된 혁명적 상황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은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침묵 뒤에 독일과 프랑스 정권을 의식한 헤겔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벅모스가 ‘헤겔의 침묵’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비판하는 대상은 ‘헤겔과 아이티의 연관에 대한 침묵’이다. 헤겔 연구자들이 견지해온 이 침묵의 한 원인은 다름 아닌 분과학문의 뚜렷한 경계다. 분명하게 정립된 분과학문 방법론은 그에 순응하지 않는 주제와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그런데 이 침묵의 더 깊은 뿌리는 계몽주의와 그 학문적 후예들이 유지해온, 실제의 노예와 아이티 자체에 대한 침묵에 있다. 벅모스는 계몽주의자들이 ‘노예’와 ‘노예제’를 이성에 반하는 것으로서 비난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노예와 그들의 참상에서는 눈을 돌렸다고 비판한다. ‘노예제’는 억압이나 굴종의 상태에 대한 은유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헤겔 학계의 주류는 실제의 노예를 시야에서 배제한 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논의해왔으며, 지난 200년간 ‘헤겔과 아이티’라는 주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벅모스는 여기서 비난의 화살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돌린다. 루카치, 마르쿠제, 코제브 같은 20세기 “헤겔-마르크스주의자”의 “단계론적 역사 이해”에서 노예제는 “(그것이 아무리 당대의 현상이었더라도) 전근대적 제도로 간주되어 서사에 진입하지 못하고 과거로 추방”(86-87쪽)되었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를 넘어, 보편사의 새로운 구상
아이티 혁명의 주된 동력은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한 노예들의 자기 해방 의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 뒤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요인들도 있었다. 프리메이슨을 포함한 백인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정신적 . 물질적 지원도 그 하나지만, 흑인 노예들 사이에 남아 있던 아프리카에서의 전투 경험(서인도제도로 끌려온 많은 흑인들은 서아프리카의 부족 간 전쟁에서 패한 전쟁 포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 언어적 . 문화적 전승이 있었다. 이 전승은 상당 부분 파괴되고 이질적 요소들과 혼합되었지만 여전히 흑인 노예들의 정신을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이렇게 유럽의 보편주의와 근대성 개념에 도전하는 면에서 수전 벅모스는 탈식민주의 진영에 속한다. “철학적 학문의 역사는 서구의 사상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서 식민지 경험을 배제해온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33쪽) 그러나 벅모스는 여기서 중요한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다시 인간의 보편성과 보편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헤겔과 아이티」 발표 이후의 반응을 돌아보면서 저자는 말한다. “이 글은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을 기쁘게 했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못했다. 이 글은 서구 근대성의 유산을 해체하면서도(이 점은 갈채를 받았다), 다수의 대안적 근대성을 요청하는 대신 근대성의 보편적 의도를 구해낸다는 덜 인기 있는 목표를 제시했던 것이다.”(5쪽) 『헤겔, 아이티, 보편사』가 지니는 궁극적 의의는 이 책이 전 세계의 사건들을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켜온 서구의 사이비 보편주의, 즉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제3세계 특수주의나 다원주의로 맞서지 않고 오히려 제3세계적 경험의 보편성을 주장한다는 데 있다.
벅모스는 보편성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다. 벅모스가 제시하는 보편성의 새로운 기초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배제의 배제’ 원칙이다. 서구의 인류 개념에 함축된 ‘문명’, ‘문화’, ‘진보’ 등의 관념은 특정 존재에 대한 배제를 내포한다. 아이티 혁명의 의의는 공동체의 구상에서 이러한 배제를 배제한 데 있다. 그러나 이 ‘배제의 배제’는 감상적 세계동포주의가 아니라 인류나 인권, 사회, 기타 보편성의 범주를 참칭해서 행하는 부당한 배제와의 싸움이며 그렇게 배제당한 존재들의 급진적 수용이다.
둘째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다. 보편성은 더이상 위로부터, 어떤 우월한 지점으로부터, 특수한 것들을 포괄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는 범주가 아니다. “신세계로 끌려온 수백만 명의 노예는 종종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집단mass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은 언어, 종교, 관습, 정치제도 면에서 식민지의 유럽인들만큼이나 다양”(177쪽)했는데, 이 다양한 인간들은 자신을 해방하려는 의지로 서로 연결되었고 혁명적 목표를 위해 연대했다. 이 연대 속에 종족과 민족을 넘어선 보편 인류가 서서히 출현한다. 벅모스는 라인보와 레디커의 책 이름을 따서 식민주의 세력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 선원, 노예 들의 잡다한 무리를 ‘다두多頭의 히드라’로 부르며, “‘아래로부터의 보편주의’를 주창한 이들은 혁명의 시대에 인류라는 하나의 인종에 대해 말했”(149쪽)다고 적는다. 여기서 보편성은 철저히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되며 이렇게 형성된 보편성은 “종합적이기보다 측면적lateral이고 부가적이며 혼합주의적”(206쪽)이다.
셋째는 단절적 순간의 경험이다. 보편성은 어떤 특수한 순간에 출현하며 이 순간은 존재의 역사적 단절이 경험되는 순간이다. 생도맹그 섬의 흑인 노예들은 문화적ㆍ정서적 단절을 극단적으로 경험했다. “인류 보편성은 (…) 파열 지점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 출현한다. 자신의 문화가 무리한 압력을 받아 붕괴될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불연속성 속에서다.”(183-184쪽) 역사의 지속이 아닌 단절, 안정된 정체성이 아닌 그것의 파괴, 라캉 식으로 말해 자신의 존재를 보증해줄 ‘대타자’와 결별하는 그 위태로운 순간의 경험이 보편성이 나타나는 필요조건이다.
바로 이 역사적 순간에 아메리카의 역사가 보편 인류의 기획에 기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집단적ㆍ정치적 참여는 관습이나 민족정체성, 종교, 또는 인종에 기초할 필요가 없다는 관념—주지하듯이 현실이 아직까지 따라잡지 못한 관념—이다. 미국 제국주의는 이 관념의 기원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세계 노예제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