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서봉은 건축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는 과연, 잘 지은 집처럼 구조적인 동시에 단열도 잘되어 있다. 뜨거울 때는 오롯이 뜨겁고, 서늘할 때는 오롯이 서늘하다. 2005년 『작가세계』로 등단했을 당시에도 문학평론가 이경호, 홍용희로부터 “천서봉의 시적 어조와 화법은 명주실처럼 매우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강한 견인력을 지니고 있”으며 “온유하면서도 끈덕진 감성의 언어를 통해 입체적으로 감각화하고, 그 의미를 적요한 시적 울림으로 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격찬받았다.
시집에 시인의 이름이 들어갔다. 사실 시인은 망설였으나, 편집부에서는 그만큼 자신 있었다는 얘기다. 천서봉이 서 있는 이질적이면서 도드라지는 좌표, 독보성과 탁월함을 내걸고 싶었다. 서봉씨의 가방을 함께 열어보면, 아마 시집 표지와 비슷한 색일 그 가죽 가방 안에는, 손에 완전히 익어 잔 생채기가 더 아름다운 설계 도구와 함께 시가 되기 직전의 조각 메모들이 가득할 것이다. 이 시집은 그 가방 안에서 태어났다.
그리움의 복용량에 대한 치밀한 실험
맨 처음 만나는 시가 처방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처방전은 왜 필요한가? 지키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방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식후 30분 후에 복용할 것.
2. 한 번에 두 편 이상 복용하지 말 것.
3. 하루 다섯 편 이상 복용하지 말 것.(「프롤로그」 부분)
이 시집의 그리움 농도가 너무 높아, 잘못하면 간(肝)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이 아니라도 분명 어떤 치명적인 기관에 무리가 가고 말 테다. 어째서 그리움이 위험한 수치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면, 서봉씨가 “세월이란 것이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문고판 하이틴 로맨스」) 하고 문득 황폐한 곳에 서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이중 직업의 시인은 가장 단단한 것을 만지며 가장 희미한 것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의 요건을 그만큼 갖춘 시인은 없다. “그립지 않은 것도 가끔은 그”리울 정도인데(「폭설」) 심지어 그의 데뷔 시에서 그리운 대상은 적(敵)이다.(「그리운 습격」)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바람의 목회」 부분)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내를 보았다. 같이 무너져버리고 싶다고 내게, 사랑니가 말했다.(중략) 향(香) 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 냄새 맡아보았다. (중략) 벌레의 부드러운 다리들이 허공을 엮는 것 보다가 향기가 지워진 책들을 불살라주었다. (중략) 꽃 속에서 죽은 적이 있다. 단물에 젖은 날개가 훈장 같았다.(「너무 오래 사랑하다」 부분)
잃어버린 애인이나 구름은 꼭 그만큼의 질량으로 비를 만든다. 얼지 못해 겨울로 내리는 비, 고막마다, 상처를 품은 골목마다 지그시 흘러드는 기억들.(「윤달」부분)
죽은 나무들과 한참 이야기하다보면 문득 먼저 간 시인이 그리워 쓸쓸한 시구에 더러워진 발을 헹군다.(「이연주」부분)
하루치 복용량을 삼키고, 천서봉은 해독의 공식을 떠올리려 한다. 그리움을 폭발시키거나 줄줄줄 흘리지 않고 차분히 분해해버리는 그의 방식은 어떤 시인과도 다르다. 이를테면 “그 주춤거리는 마찰계수나 절망에 관한 불후(不朽)의 공식 같은 거”(「뿌리내리는 아버지」)를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공식들이 시인을 살렸다. 그 공식들이 없었다면 “당신은 사라지고 밀실엔 살인보다 지독한 그리움 번”(「폴라로이드」)질 때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다.
한 줄의 명제는 그리움의 인력(引力)을 재는 척도
그리움의 독소에 침범당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정확한 계량이 필요하다. 계량에는 자[尺]가 최고인데, 자라는 것은 모름지기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길어도 지나치게 짧아도 안 된다. 천서봉의 자는 그가 제련에 제련을 거듭해서 얻어낸 한 줄의 명제들이다. 손에 쥐어지는 한 줄이되, 가볍지 않다.
내 거친 영혼은 재설계가 가능할까.(「납골당 신축 감리일지」 부분)
평생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픔의 종류를 구분하는 상자를 하나 얻는 것.(「종합사회복지관」 부분)
일생이란, 가령 츄파춥스를 가득 실은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 것뿐이다. 나는 통통한 볼을 가진 소녀의 이름을 다시금 생각했다.(「한아름」 부분)
정류장마다 절망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절망을 만나러 가던 길 아니었으므로.(「불심검문(不審檢問)」 부분)
천서봉의 연작 중에 「행성 관측」 세 편이 시사하듯, 결국은 인력(引力)의 문제다. 적절한 거리에서 빨려들어가지 않는 것. 그것이 또 하루를 보장한다. 그리움 자체가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리움을 이기는 데에도 거리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이 거리감을 두고 평론가 조강석은 “엄살이나 과장 대신 관찰과 귀납의 힘으로 서봉씨는 대상에 대한 과도한 애착을 끊어내고 그것을 삶에 대한 사유의 힘으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짚어냈다.
멀리서 봐야 더 투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비가 되어버린 구름의 후일담”(「구름 편력」)이나 “국밥 그릇 속엔 늘 같은 종류의 내재율이 흐르고”(「행성 관측」) 있다는 담담한 사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천서봉은 스스로를 그리움으로부터 지켜내고, 심지어 그리움에 흐느끼는 다른 존재들까지 조심스런 손길로 도닥인다.
조금은 너도 견디고 있구나, 저녁의 긴 다리가 미끄러진다. 환각 위로 또 눈이 엎어진다. 이미 녹은 눈이 어린 눈을 안아 녹인다. 괜찮다 괜찮다, 소한 소한 눈 날린다.(「소한(小寒)」 부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말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오늘 저렇게 빛나는 별이 사람을 잊는다. 누군가 저 별을 바라보며 길을 잃지 않겠다 싶어 인력(引力)이라 쓰고 인연이라 읽는다.(「행성 관측 3」 부분)
오늘도 천서봉은 “갈비뼈 같은 도면을 쥐고 신촌의 날카로운 지하방으로 내려”(「이상 기후」)가고 있을 것이다. 파이프와 전선과 아직 개지 않은 시멘트 부대 사이에서 그가 그의 가방에 또 어떤 시의 조각들을 주워 담을지, 우리는 궁금함을 못 이겨 가방 버클을 만지작거리고 만다. 그렇게 서봉씨와 함께 그리워하고, 또 그 그리움을 견디는 공식을 외울 것이다. 다시 첫 장의 처방전을 기억하자. 하루 다섯 편 이상은 복용하지 말 것. 가죽 가방처럼 해질 때까지 오래 읽고, 다시 읽을 시집이다.
● 시인의 말
내 시(詩)는
수만 장의 나뭇잎처럼 자잘할 것.
소소한 바람에도 필히 흔들릴 것.
그러나 목숨 같지 않을 것.
나무 같을 것.
또한 나무 같지 않아서 당신에게 갈 것.
입이 없을 것. 입이 없으므로
끝끝내 당신으로부터 버려질 것.
세월이란 것이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탕진의 그 방대한 여백만이 시의 몸이 되었으니 지금 더듬을 수 없는 것만이 다시 희망이 될 것이다.
시를 써오는 동안, 내가 바란 것이 있다면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날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 날 만나고 싶은 착한 당신들과
천기태 교수, 김창옥 여사께 나의 첫 시집을 바친다.
2011년 겨울,
천서봉
● 책 속에서
서봉氏의 가방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을 넣어야 한다,
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거리는
더 커다란 가방을 사주거나
사물을 차곡차곡 접어넣는 인내를 가르쳤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은 집을 놓치고
어느 날, 가방을 뒤집어보면
낡은 공허가 쏟아져, 서봉氏는 잔돌처럼 쓸쓸해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령 흐르는 물이나 한 떼의 구름 따위,
망상에 가득 찬 머리통을 담을 수 있는, 그러니까
서봉氏와 서봉氏의 바깥으로 규정된 실체를
통째로 넣고 다닐 만한 가방을 사러 다녔지만
노을 밑에 진열된 햇살은 너무 구체적이고
한정된 연민을 담아 팔고 있었다.
넣을 수 없는 것을 휴대하려는 관념과
이미 오래전 분실된 시간
거기, 서봉氏의 쓸쓸한 가죽 가방이 있다.
오래 노출된 서봉氏는 풍화되거나 낡아가기 쉬워서
바람이나 빗속에선 늘 비린 살내가 풍겼다.
무겁고 질긴 관념을 담고 다니느라
서봉氏의 몸은 자주 아프고
반쯤 벌어진 입은 늘 소문을 향해 슬프게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