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으로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던 허수경, 그녀가 2011년 12월 장편소설 『박하』를 들고 다시금 한국을 찾았다.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근 4개월에 거쳐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일일연재로 소개된 『박하』는 그 시작부터 여러모로 화제가 된 소설이었다.
시인 허수경이 쓴다는 거,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가 공부로 삼은 고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거, 한 세기를 놓고 교차하는 과거와 현재로 말미암아 인간이라는 존재의 안팎을 시공간을 거슬러 끊임없이 묻고 있다는 거, 그렇게 집요하게 근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거, 특유의 애잔한 정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던져져 있으나 그걸 집는 마음의 구부러짐으로 결국 인간의 심장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거.
사고로 아내와 아이 둘을 잃고 선배가 있는 독일로 떠난 한 사내가 있다. 그의 이름 이연, 『박하』는 바로 그 사내, 이연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라고 쓰인 노트 속 칸의 이야기가 교차하여 전개된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이연은 출판 편집자다. 한 사람의 인생 항로를 바꾸는 정말 좋은 책을 만들고 싶었으나 참고서 팀으로 발령이 나더니 결국 실업자가 되고 만다. 거기다 저릿한 연애 시절을 거친 후 결혼한 아내마저 두 아이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다.
두 번이나 불륜을 저지른, 사십대 중반의 허허로움을 이기지 못해 부유하던 그였으나 그로써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런 이연에게 대학 내내 동지였던 마준이 노트 한 권을 건넨다. 20세기 초 중국을 떠돌다 독일인에게 입양되어 고고학자가 된 이무의 기록이었다.
이연은 그 기록을 읽으며 이무과 자신을, 또 이무와 마준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연은 마준을 따라 독일로 가고, 거기서 또 이무의 기록을 따라 터키로 향한다. 이무의 기록에는 하남이라는 고대의 도시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이무는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노마드 여인 하남을 만나게 되고, 하남에게는 동시에 여러 시간을 살아가는 병이 있다. 하남과 사랑에 빠진 이무는 그녀와 삶을 꾸리고 싶어하지만, 탐욕스러운 식민지 시대의 기운이 터키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이무의 기록을 모두 읽고 난 이연은, ‘존재하지 않는 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여둔 책에 대한 아이디어 폴더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아내가 썼던 시 한 편으로 시작을 꿈꾼다.
그녀가 서 있는 곳, 그곳은 고대였고
내가 서 있는 곳, 이곳은 20세기.
나는 하남을 불러보았다.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그녀도 이 시간, 내가 서 있는 시간 속에 있구나.
다행이었다. 참으로 거짓말 같은 참말.
-p178
“이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벌써 6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처음,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던 하투샤라는 폐허 도시를 방문할 때였어요.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고대 도시였지요. 처음 그 고대 도시를 방문한 날 저는 그곳에서 바위 계곡에 피어 있던 야생 박하를 보았습니다. 박하향은 희미했으나 그 향기에 몰두하면 할수록 향은 더욱더 진하게 제 코를 스쳤습니다. 그 냄새 속에 몇 사람의 얼굴과 삶이 떠올랐습니다.”
박하로 대변되는 자연, 그 자연을 우리가 왜 찾는가…… 결국 그 무한성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1세기 만에 우리는 얼마나 빨라지고 거대해졌는가. 우리가 이룩했다고 믿는 그것, 그 발전의 그늘 뒤에 남은 우리의 모습은 과연 그에 비할 만큼 성장하고 성숙한 그것인가. 시인 허수경의 소설적 촉은 바로 그로부터 발한다.
우리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아팠다면, 통증을 느꼈다면, 그것이 또한 치유이리라. 인간의 몸이 원래 그러하므로. 본디 자연을 따르는 것, 그렇게 자연을 영혼 속에 새기는 것, 이 소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