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를 비판한 레비스트로스를 향한 재반론!
마르크스주의의 물신物神 개념을 접목한 증여의 현대성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1996)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Essai sur le don』(1925)에 대한 재해석이며 재평가이다. 또한 모스를 비판한 자신의 스승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에 대한 반론이다. 고들리에는 레비스트로스를 경유하여 모스를 재발견한다.
모스의 『증여론』은 증여 교환(또는 선물 교환)을 인간 사회 생활의 기본 원리로 인식하고 증여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선구적 저술이다. 그러나 모스는 직접 현지조사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고, 훗날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했듯 사물 속의 ‘영적인 힘’이라는 종교적 영역을 끌어와 증여를 신비화함으로써 과학적 사고를 결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종교적 설명을 거부하고 사회의 기원을 정신의 무의식적 구조와 상징화 능력에서 찾았다. 반면 고들리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물신 개념에 기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주장을 재비판하며, 모스가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레비스트로스도 간과했던 ‘신성재神聖財, object sacré’의 존재를 통해 ‘증여의 수수께끼’에 접근한다.
지금, 다시 증여에 대해 논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증여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사회적 연대, 자선과 기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장 경제, 그것도 시장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왜 다시 ‘증여’인가?
서문에서 고들리에가 밝히듯, 우리 사회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규모를 줄이고’ 비용을 낮추어 생산력을 높이는, 그래서 노동력을 감소시켜 대량 해고와 실업을 유발하는 사회 체제”이다. 돈 없이는 사회적 삶도 없으며, 사실상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개인의 사회적 삶이 경제에 의존하면서 빈부 격차, 노사 갈등 등 ‘사회적 균열’도 커져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사회를 통합하고 간극을 메울 책임이 있지만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증여하고 분배하라는 요청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고들리에는 모스에게로 돌아간다. 사회적 삶의 근간을 이루는 ‘증여’의 참된 의미를 되묻기 위해서다. 원시 부족사회에서 증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재화의 교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단적이고 의무적이며, 물질적 이익과 사회적 권력,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의미가 함축된 사회적 교환, ‘전체적 급부prestation totale’였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스에 대한 재평가,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비판 재검토
모스는 시장의 존속을 주장하면서도 자유방임주의에 국가가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모스는 사회를 “상인, 은행가, 자본가의 냉정한 계산”의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선구적으로 사회 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려놓았다. 그것이 바로 『증여론』이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고들리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물신 개념과 사회구성체론을 접목시켜 모스의 『증여론』을 새롭게 해석한다. 고들리에에 따르면, 모스는 증여의 수수께끼를 다 풀지 못했다. 모스는 증여에 관해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내놓았다.
과거 혹은 고대 사회에서 증여를 받은 뒤에 답례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이해관계와 법적 원리는 무엇인가? 증여된 물건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힘이 수증자가 답례하도록 만드는가? (19쪽)
모스는 증여를 세 가지 의무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즉 증여하기, 수증하기, 그리고 답례하기. 여기서 모스는 답례의 의무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사물 안에 힘이 존재하며, 이 힘이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를 유통시키게 만들어 최초의 소유자에게 돌아가게 만든다고 가정했다.”(33쪽) 이것이 폴리네시아의 마나, 하우 개념이다. 이 지점에서 모스는 ‘종교적’ 영역을 끌어들인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에게서 나타나는 논리적 허점을 지적했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마나, 하우의 개념은 “의미가 없는, 따라서 어떤 의미도 수용할 수 있는 기표” 혹은 “부유하는 기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생활이 교환 형식들(여성, 재화, 언어 등)의 결합에 기초하며, 무의식적 마음 구조와 유기적으로 접합된 상징체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상징적인 것’이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고들리에는 뉴기니 바루야족을 수년간 현지답사하고 나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비판을 재검토하고, 교환과 사회 구성 원리에서 ‘상상적인 것’이 ‘상징적인 것’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그런 발견의 중심에는 ‘줄 수도 팔 수도 없고 간직해야만 하는 사물’, 즉 ‘신성재’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들리에는 증여에 대한 논의의 초점을 ‘증여되는 사물’에서 ‘보존되는 사물’로 과감히 이동시켰다.
신성재 : 증여와 판매가 불가능한, 오직 간직해야만 하는 사물
신新모스주의자인 아네트 와이너Annette Weiner는 『양도 불가능한 점유물: 보존하면서 증여하기의 역설Inalienable Possessions: The Paradox of Keeping-while-Giving』에서 말리노프스키와 모스가 풀지 못한 채 남겨둔 문제를 해명할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고들리에는 어떻게 물건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증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아네트 와이너의 논의를 기반으로 삼아 증여할 수 없는 물건, 신성재의 비밀에 다가간다. 신성재는 사회의 ‘고정점’으로, 사회가 스스로 돌아가게 하여 사회를 생산, 재생산하게 하는 메커니즘의 중심축이다. 고들리에는 상품 교환 혹은 증여 교환으로부터 면제된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와 정체성도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없고,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루야족의 콰이마트니에, 부싯돌, 황소울음피리가 그런 신성재의 예이며, 성인식 등에서 중요한 의례 도구로 쓰인다. 이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지만, 그 혜택만은 부족의 모든 성원에게 양도 가능하다. 양도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물건의 효력인 것이다. 사회를 결속하고 재생산하는 힘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고들리에는 사회의 존재가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것뿐 아니라 상상적인 것에 의존한다고 보며, 상징적인 것의 우월성을 주장한 레비스트로스와 라캉과는 달리 상상적인 것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신성재는 바로 그 상상적인 것이 물상화된 표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신성재에 해당하는 것은 화폐와 헌법이며, 이는 현대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상적 전제이다.
현대 사회에서 화폐의 본질과 증여의 귀환
신성재와 화폐의 기원을 이어주는 고리는 신성재의 대체물인 ‘가치재’이다. 오늘날의 화폐는 세속화된 가치재, ‘신성한 기원’과 단절된 채 상품 교환에서만 쓰이게 된 가치재이다. 가치재가 화폐로서 유통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상상적’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이 상상적 가치는 ‘법’이라는 공적인 인증절차를 거쳐 화폐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유통시킨다.
모스는 이런 화폐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화폐가 움직이고 교환되기 위해서는 교환 밖에서 보존되는 사물, 즉 그것을 기점으로 인간, 재화, 용역이 유통하게 만드는 고정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
고들리에는 묻는다. 모든 것이 교환되고 판매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증여와 신성재는 어느 곳에 있을까?” 그리고 ‘인격체로서의 개인’과 ‘헌법’이라고 답한다. 경제적 행위자로서의 개인은 상품화될 수 있지만, 정신과 신체를 가진 개인이 온전히 상품이 되는 일은 없다. 헌법도 상품 관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헌법은 그곳을 선택하고 투표한 모든 사람들의 ‘양도 불가능한 공유물’, 공동의 공공재이다. 남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힘이다.
“신화, 종교 교리, 철학의 원리로 표현되는 이 모든 체계에 맞서 사회과학은 인간을 인간의 자리(사회 속에 사는 존재일 뿐 아니라, 살기 위해 사회를 생산하는 존재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비판 기능을 수행한다.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 인간의 실천, 그리고 인간의 사고 심리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281쪽)
“우리는 개인 안에 잠자던 모든 힘과 잠재성을 역사적으로 전례 없이 해방시켰지만, 다른 사람을 이용해 살아가도록 종용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연대의 영구적 결핍을 대가로 우리 사회는 살아남고 번영한다. 더욱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란 오직 계약 형식에 의한 거래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협상될 수는 없다. 개인들을 연결하는 것, 곧 그들 간의 관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 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는 인간이 사회에서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회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