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찬란하게 낡은 동시집이었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강아지똥」보다 5년 앞선 시점에 묶은 『동시 삼베 치마』는 그야말로 권정생 문학의 시원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에 주목하느라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시세계의 전모가 『동시 삼베 치마』의 출간을 계기로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_안도현(시인)
권정생 선생이 직접 쓰고 그리고 꾸미고 엮은
단 한 권밖에 없는 시집, 평생을 가슴에 품었던 미발표작 출간!
안동 조탑 마을 빌뱅이 언덕에는 손바닥만 한 흙집이 있다. 전기가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호롱불 아래, “생각에 젖을 수 있어” 좋았던 이 언덕집에서 권정생 선생은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이 집은 선생의 유지대로라면 이미 자연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여전히 빌뱅이 언덕을 지키고 있다.
정호경 신부를 비롯한 유품정리위원회는 이곳의 세간과 유품 목록을 정리하다 뜻밖에 책 형태를 띤 두툼한 원고 묶음을 발견한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빛바랜 낡은 책은 ‘삼베 치마’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한 번도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권정생 선생의 미발표작이었다. 그것도 동화가 아닌 시! 권정생 선생이 쓰고 그린 이 육필원고는 유품전시관으로 옮겨졌고 이를 맞닥뜨린 안도현 시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측에 이 책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한다. 오랜 논의 끝에 출간은 결정된다.
‘권정생 지음’이라고 또박또박 시의 주인을 밝히고, 9부 각 장마다 제목을 쓰고, 빨강 파랑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꾸미고, 풀을 붙여 손수 제본까지 한, 그러나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이 시집은 권정생 선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시 삼베 치마』에 수록된 「강냉이」라는 시가 초등학교 때 쓰인 것을 생각하면 거의 육십 평생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셈이다. 평생을 버리지 않고 마음 한편에 지니고 있었을 이 동시집은 권정생 선생에게 무엇이었을까?
「강아지똥」보다 5년 앞선 권정생 문학의 시원이 담긴 책
동화보다 상대적으로 조명되지 않았던 권정생 선생의 시세계, 수많은 작품 가운데 시집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한 권뿐이지만, 동화 「강아지똥」이 동시로 먼저 쓰였다는 것을 알면 그동안 그의 시를 접할 수 없었던 데에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다.
『동시 삼베 치마』는 권정생의 문학을 세상에 처음 알린 「강아지똥」(1969년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 모집에 당선)보다 5년 앞선 시점인 1964년에 묶였다. 1964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로 이후 선생은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지만 이 시집은 그보다 이른 1월 10일에 묶인다. 그즈음은 권정생 선생이 얼마간의 행복을 느끼던 시기로, 병세가 호전되고 방황을 거듭하다가 고향에 돌아온 지 6년 만에 교회학교 교사로 정식 임명된 즈음이다.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은 권정생 선생이 더 미루지 않고 그동안 써온 시들을 정리해 한 권으로 묶었을 때는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첫머리에 권정생 선생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열다섯 전후의 어릴 적 억이랑 주야랑 내 이웃들 재미있게 여기다 적었습니다. 열다섯 전후의 어릴 적 그때의 생각은 어땠을까? 슬픈 일 기쁜 일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964년 1월 10일 묶음”으로 끝맺음하였다.
열다섯 소년 권정생의 눈과 세상이, 그 시절의 풍광과 인정이, 말로 다하지 못했던 삶의 궤적이, 움트고 있던 문학에의 열정이 『동시 삼베 치마』 한 권에 담겨 있는 것이다. 스물일곱 살의 권정생은 일기와도 같은 이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돌담 위로
앞집 호박 넝쿨
뒷집 호박 넝쿨
앞집 호박 넝쿨
뒷집 쪽으로 기어가고
뒷집 호박 넝쿨
앞집 쪽으로 기어가고
호박 넝쿨이
전쟁 시작나!
서로 돌진해 간다
밤 자고 나면
흠씩흠씩 쳐들어가 있다
이젠 한 뼘만 더 가면
맞붙는다
누가 이길까?
아아니?
호박 넝쿨 서로 고개 숙이고
사알짝 비키며 간다
앞집 호박 넝쿨
“제 등을 타 넘고 가세요”
뒷집 호박 텅쿨
“제 등을 타 넘고 가세요”
호박 넝쿨은
사이 좋게 어울려
빈자리 없이 퍼런 이파리를
덮는다
호박 넝쿨은
전쟁하지 앟고
정답게 돌담 가득
꽃피웠다.
-「호박 넝쿨」 전문
열다섯 전후,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의 선생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일본에서 귀국한 46년은 보릿고개가 심해 식구가 뿔뿔이 흩어졌고 “함께 동무했던 아이들과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실망했지만, 48년에는 동생과 일학년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의 설렘을 맛보며 같은 반 동갑내기 여자아이에게 풋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육이오전쟁은 어렵게 모인 식구들을 다시 헤어지게 했고 살림살이는 여의치 않아 1956년에야 선생은 육학년을 졸업한다. 후에는 가계 살림을 보태기 위해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점원으로 일하며 객지를 떠돌고 1955년에는 평생의 짐인 결핵을 얻게 된다.
이 시기 어린 권정생의 눈으로 본 시대의 자화상은 총 98편의 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따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퉁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강냉이」 전문
어린이의 눈으로 기록하여 더 진솔하고 말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폭넓고 깊은 성찰이 있다.
「강냉이」와 더불어 『동시 삼베 치마』에 실린 몇 편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1987)의 3부에 이미 발표된 것이지만 한 편의 시를 둘로 쪼개기도 하고 어휘를 고치고 다듬어 원문과는 좀 다르다. 원문은 안동 사투리와 입말이 살아 있고 덜 다듬어 정돈되지 않았지만 선생의 당시 언어생활을 짐작케 한다. 안도현 시인은 “표준어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이런 사투리 입말이야말로 권정생 문학의 뿌리를 알려주는 지표”라고 말한다.
시냇가 말뚝에
목매인 송아지
지난 장날 엄마하고 헤어져
팔려 왔나 봐,
잔디풀을 오득오득
뜯어 먹다가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동동
엄마하고 같이 보던 구름……,
그래서
음매―
음매―
울어 버렸다.
-「송아지」 전문
“어린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자연 속의 생물들도 같이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던 권정생 선생의 철학을 우리는 『동시 삼베 치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랑에 토라진 어린아이의 마음이 소박하게 드러나는 시도 있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난
늬 이름을 잊았부렀다
다만 탱자나뭇집
가스난 줄밲이 모온다
그라곤
고것 말있다
한창 보리고갯때
칡뿌리떡 쫌 안 준다꼬
쌈한 뒤
상굿 말 안 하고 지난
가스나아야!
보리알이 누우런
단옷날
귀땅머리에 창포꽃 따 꽂고
옥색 저고리
이쁘장하게 꾸미고
그넷줄 느티나무에
기대 선 내한테
가스나아야!
쑥절편 한 쪼가리
뺄죽 내밀맨서
깜빡거리던 두 눈
가스나아야!
고게 정녕
칡뿌리떡 값은
아니었겠지
그새
앵두나무 밑에서
사리사리 엮어뒀던
가스나아야!
늬 마음
모두를 내민 거지
가스나아야!
-「쑥절편」 전문
작품 배열은 권정생 선생이 엮은 그대로를 따랐으며 시의 정취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원문을 최대한 살렸다. 또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각 부 도입부에 실어 원본의 형태를 짐작케 했고 단번에 뜻이 와 닿지 않는 말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를 덧붙였다. 원본에는 퇴고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데, 다 옮겨 올 수는 없어 책 말미에 몇 장의 사진을 붙여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퇴고의 흔적 중 재미있는 것은, 2부(꽃가마)와 3부 (삼베 치마)의 제목이 바뀐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시는 총 9부로 나누었는데 그중 2부에는 시집 간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들로 그득하다. 당시 권정생 선생의 식구들은 흩어져 살아 누나들이 시집가는 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함께했던 시간이 짧았기에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절절한 듯하다. 4부 장길 바구니에는 장날의 정경이 6부는 짧았지만 선생의 마음에 깊은 인상으로 남은 학교생활이(부를 통틀어 편수가 가장 많다) 9부는 다섯 살 때 누나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통해 예수를 접하고 싹텄던 신앙이 드러나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6부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검정 고무신
나란히 두 켤레
내 건 구멍 뚫린 헌 고무신
명호건 그저께 새로 산
새 고무신
명호가 모르고
내 고무신과
짝짝이 신고 갔다
남은 한 짝 고무신
빨빨 새 고무신
그렇지만 난
구멍 뚫린
내 고무신이 진짜
“명호야! 신 좀 봐”
명호가 내려다보고
짝짝이 신 알았다
나 한쪽 발 벗고
짝발 딛고
명호 한 쪽 발 벗고
짝 발 딛고
헌 고무신
내 발이 쏘옥
새 고무신
명호 발이 쏘옥
교문 밖으로
빵빵 굴러 간다.
-「짝짝신」 전문
작품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도 그를 알았던 모든 이들에게 참 감동이 무엇인지 일러 준 그. 1984년 권정생 선생과의 인연을 시작했던 시인 안도현은 “말수가 적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그 목소리가 회초리처럼 맵고 단호”했다고 회상할 만큼 시대의 성찰자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았던 작품 이전에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 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동시 삼베 치마』가 그와, 그의 문학과, 소년 권정생과 우리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