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와도 같은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청년기의 영혼을 표출시키고, 그 또래 젊은이들에게 요구되는 ‘성인으로서의 변신’을 준비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을 사십 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동시대의 사건으로 읽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21세기의 니스와 서울, 파리는 여전히 모순과 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보호막 역할을 해줄 흉벽조차 없이 현실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_J. M. G. 르 클레지오
노벨 문학상 작가 J. M. G. 르 클레지오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최초의 작품
데뷔작 『조서』와 함께 J. M. G. 르 클레지오의 초기작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홍수』가 국내 최초로 완역되었다. 『홍수』는 원작이 출간된 1966년 직후 국내 번역 출간된 적이 있지만, 백미라 할 수 있는 프롤로그 부분이 번역되지 않았던 까닭에 독자들이 이 작품의 정수를 맛볼 기회는 그동안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수』 출간 당시 문학평론가인 피에르 로스트와의 대담에서 르 클레지오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서로 독립된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타인의 이야기이도 한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를 여러 장에 나누어 쓴 것인데, 『조서』가 제1장으로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에게 문학의 발견인 동시에 일종의 자기소개서와도 같은 작품이라면, 『홍수』는 그 뒤를 잇는 제2장인 동시에 세계의 역사를 재창조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르 클레지오가 『홍수』를 구상한 것은 열두 살에서 열세 살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데뷔작인 『조서』보다 먼저 이 작품의 집필에 들어갔는데,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게 다가갈 듯해 『조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홍수』는 르 클레지오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청년 르 클레지오의 패기가 느껴지는 폭풍우와도 같은 작품
『홍수』는 프랑수아 베송이라는 사내가 십이 일간의 방황과 투쟁을 거쳐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전작인 『조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에서도 르 클레지오는 도시문명으로 대표되는 사물과 인간존재의 대립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주인공 프랑수아 베송은 『조서』의 아담 폴로보다 더 진지하고 수난자적 면모가 부각된 인물이다. 『홍수』에서 르 클레지오는 거대한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왜소한 인간을 좀더 커다란 스케일로 형상화했다. 작품의 처음을 여는 장중한 창세기풍의 산문시 같은 프롤로그는 어느 대도시(작가가 청년기를 보낸 남프랑스의 니스)의 형상을 압도적인 상상력과 언어로 그려낸다. 미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이미지로 밀려드는 홍수와도 같은 언어들, 괴물 혹은 지옥과도 같은 형상으로 다가오는 도시의 이미지를 묘파해낸 예지자적 문장들에서는 이십대 청년 르 클레지오의 패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홍수』의 일본어판을 번역하기도 한 문학평론가 모리즈키 요시로는 “모든 프롤로그를 통틀어 『홍수』의 그것보다 길고 난해하기는 하나 르 클레지오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없다”고 했을 정도다.
르 클레지오는 누보로망이 한계에 봉착해 있던 1960년대 프랑스 문단에 등장한 혜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기법상의 혁신만을 추구하지 않고 새로운 자기 인식의 틀을 제시함으로써 내면적 역동성을 획득했고, 그렇게 프랑스문학의 전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나가 오늘날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되었다. 르 클레지오가 가지는 새로움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과 합일된 삶을 음악적 언어로 그려낸 후기 작품들에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홍수』는 이제 막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 청년 르 클레지오가 치열하게 탐색했던 전인미답의 영토를 맛볼 수 있는 도전적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저 소리가 들리나?
이 도시에 곧 홍수가 날 거야……”
『홍수』는 ‘프롤로그-이야기-에필로그’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야말로 파괴와 환시의 산문시라 할 70여 페이지의 프롤로그를 지나고 나서 프랑수아 베송의 십이 일간의 궤적이 그려진다. 한 사립학교의교사였다는 것 말고 프랑수아 베송이라는 인물에 대해 주어지는 정보는 없다. 그는 어느 늦겨울 밤, 안나라는 여자가 보낸 녹음테이프(자신이 곧 목숨을 버릴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는)를 듣고 그다음 날부터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첫째 날. 프랑수아 베송, 방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녹음된 테이프를 듣다. 밤이 늦어 베송의 어머니가 어서 자라고 그의 방에 들어온다.
둘째 날. 프랑수아 베송,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하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 마침내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빈 맥주잔을 깨뜨리고, 마음이 상해 다시 거리로 나간 다음 카페로 들어가 핀볼게임을 하는 소년을 구경한 후 그 자신도 게임을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기이한 소년을 만나고 그를 자신의 동생이라 생각한다.
셋째 날. 프랑수아 베송, 조제트와 만나다. 베송은 조제트와 만나기로 한 슈퍼마켓 앞에서 기다리다 작은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그들은 잠시 우체국에 들렀다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조제트의 차를 타고 어느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음증 환자 같은 한 남자가 그들을 엿보고 있음을 알고 내려온다.
넷째 날. 프랑수아 베송, 조제트의 옆에서 깨어나다. 베송은 잠들어 있는 조제트의 나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장님 노인과 얘기를 나눈다. 그는 노인에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섯째 날. 프랑수아 베송, 자기 방에서 어린 시절에 쓴 「검둥이 오라디」를 발견하고 읽다.
여섯째 날. 프랑수아 베송, 한 카페에서 빨간 머리 여인을 만나다. 그리고 여인을 따라 그녀의 아들 뤼카를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부엌에서 둘은 관계를 가진다.
일곱째 날. 프랑수아 베송, 여인의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며 일출을 바라보다. 그는 채소 시장을 거쳐 다리 공사 중인 강을 바라본 후 자기 집으로 가 짐을 싸갖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여덟째 날. 폭풍우가 치는 날, 프랑수아 베송 빨간 머리의 여인 마르트와 대화를 나누다. 그리고 태풍을 뚫고 바닷가에 가 등대로 목숨을 건 산책에 나선다.
아홉째 날. 프랑수아 베송, 여인의 집을 떠나다. 떠나기 전, 그는 뤼카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광견병으로 죽어가는 개와 그 개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목도한다. 집으로 돌아온 베송은 자신이 쓴 모든 것을 태우다가 방에 불을 지르고, 연기에 놀라 뛰어온 부모를 뒤로하고 짐을 챙겨 집을 나가버린다.
열째 날. 돈이 떨어진 프랑수아 베송,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다. 그리고 한 성당에 들어가 고해성사를 본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지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자신이 신성을 모독하였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와 구걸을 한다.
열한번째 날. 프랑수아 베송, 다리 공사를 하고 있는 곳에 가 일용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다. 그리고 밤이 내리자 자신을 해하려는 자가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신원미상의 한 남자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그는 살인현장에서 도망쳐 시가지 광장을 통과하는 지하도를 걷는다.
열두번째 날. 프랑수아 베송,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다. 들판 한가운데서 내린 베송은 정처 없이 거닐다 햇볕이 작열하는 곳에 누워 태양을 응시한다. 그가 이곳에 온 것, 그리고 태양에 자신의 눈을 내맡기는 것은 거의 운명처럼 예정지어진 것이다. 마침내 그는 눈이 먼다.
그리고 그 이후, 프랑수아 베송은 존재하지 않고 그가 살았던 도시의 하루하루는 전과 다름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어느 텅 빈 방 안에서, 한 목소리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온다. 첫날, 프랑수아 베송이 녹음기를 통해 들었던 안나의 목소리다. 안나는 자신이 이미 약을 삼켰다고, 곧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비관하고, 사랑을 믿지 않고, 세상이 힘겨운 그녀는 마침내 유리 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나고, 베송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길이 없는 방에서, 녹음기 안의 테이프도 재생을 멈춘다.
그리고 장중한 프롤로그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닿아 있는 에필로그가 이 남자의 십이 일간의 여정을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끝맺음한다.
청년 르 클레지오가 치열하게 탐색했던 전인미답의 영토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내 프랑수아 베송이라는 인물은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게 그려지지만, 그의 내면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다. 그는 인간관계의 기성 가치를 철저히 불신하는 인물이다. 부모도, 연인도, 친구도, 그 누구도 그와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는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그 사회의 도덕에 동의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개체 혹은 생물로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그 맥락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음에도, 그는 기쁨과 슬픔, 분노, 더 나아가 감동을 느끼기까지 한다. 르 클레지오는 그 감정의 근원이 개인을 둘러싼 모든 것(그러나 인간은 배제한)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믿는다.
『홍수』가 출간된 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간 프랑스문학에서 중요시되어온 전통적인 심리,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심리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게 진실한 것은 오직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사물, 자연 등등) 사이에서 생겨나는 심리뿐이다. 르 클레지오에게 인간 존재란 독자적인 것이며, 인간의 자기 인식은 사물과의 총체적인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또래 친구들보다는 곤충이나 동물을 벗 삼아 보낸 아프리카에서의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르 클레지오는 인간 존재를 다른 생물, 무생물과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위치 짓는 거시적이고 독자적인 인식 속에서 현실을 바라본다.
『홍수』의 주인공 베송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와 불화한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결국 자신의 눈을 태양에 불사르는 오이디푸스적 최후를 스스로 맞이한다. 작품 전체에 그려지는 타인의 눈目과 모든 사물에 숨은 눈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망치고, 강고하고 차갑고 적의를 띤 도시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눈을 태우는 것뿐이다. 비록 이 투쟁은 패배로 끝나지만, 작가는 주인공 베송으로 하여금 현대 도시문명을 상대로 한 지난한 싸움에 뛰어들게 하는 수난자적인 면모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일종의 결의를 보여준다.
방대한 르 클레지오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오십여 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것은 저 너머, 존재의 시원에서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계속하는 대우주를 소설로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멕시코 및 파나마 등지에서 체류하면서 극적인 변모를 거치게 되고, 1975년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발표함으로써 초기 십 년과 극명하게 나뉜다(우리나라에 소개되어 가장 널리 사랑받는 『황금 물고기』 『사막』 등이 이와 같은 변모를 거친 이후에 씌어진 작품들이다). 초기 작품들이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가차 없는 저주와 그에 반 反하는 기묘한 애정을 홍수와도 같은 언어로 투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그후의 작품들은 남미 인디언들의 자연과 어우러진 삶에서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함축적이며, 음악적 리듬이 깃든 시적 언어로 그려졌다. 『홍수』는 이와 같은 르 클레지오의 초기 작품경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작품으로, 여태껏 우리가 만나볼 수 없었던 역동성이 넘치는 젊은 르 클레지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
신선한 감각, 독특한 사색, 그리고 프랑스 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 넘치는 글쓰기로 르 클레지오를 순식간에 누보로망 이후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올려놓은 작품. _모리즈키 요시로(문학평론가)
강렬한 시적 언어가 전달하는, 존재에 대한 무시무시한 비전. _가디언
로망 피카레스크의 틀에 담긴 그리스 비극. _크리티크
옮긴이 신미경
연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프랑스 문화사회학』이 있고, 『신화』 『마법의 숙제』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 『사회학의 문제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발행일 2011년 7월 1일
* 사륙판(128×188) 양장
* 492쪽
* 14,500원
* ISBN 978-89-546-1370-5 03860
* 책임편집 해외문학 3팀 김지연(031-955-8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