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이 된 문 학, 문 학 이 된 그 림
우리 옛 그림을 감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라진 언어와 문화의 장벽 탓에 그림의 마음에 가까이 접근하기 어렵다. 하지만 천천히 공들이고 음미면 속 깊은 매력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또한 옛 그림의 매력이다.
시서화(詩書畵를) 하나로 보았기에, 옛 그림들 중에는 문학작품을 주제로 취한 것이 아주 많다. 그림 위에 시문(詩文)이 곧바로 적혀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림뿐이어도 그 속내는 시문을 취한 것도 다수이다. 옛 사람이라면 어떤 시문을 주제로 취한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테지만 지금 우리에겐 아리송하기만하다. 이것이 옛 그림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림의 바탕이 된 시문을 이해하지 않고 그림을 보는 것은 겉핥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한글세대, 더 나아가 디지털세대에게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한다.
“옛 그림 속에 깃든 문학성,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그림을 독해하는 기본문법이었고, 문자 향유의 특권을 누렸던 문사들의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건드린 장치이자, 그림 이해의 핵심 코드였다. 이것은 화면 위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면서 감상자를 끌어당겼던 ‘매력’에 틀림없다. 이것을 건져 내면 무엇이 남을까 싶은 문학성이, 그러나 오히려, 역사의 격변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우리 옛 그림을 즐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_「책을 내며」에서
역사적 격변으로, 우리는 옛 사람들이 당연히 알던 것을 어렵게 익혀야만 이해하게 되었다. 이 결과 과거에 옛 그림의 ‘매력’으로 작용했던 것이 우리에겐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림의 바탕이 된 문학작품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친절하게 해설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정서를 일일이 복원하여 그림을 깊이 감상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현대의 독자이자 감상자로서, 우리는 지은이의 친절한 해설을 발판 삼아 그림의 ‘바깥’에서 선조들의 그림문화 자체를 구경해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쉽고 애정 넘치는 해설로 옛 그림 감상의 문턱을 낮추었던 오주석 선생의 그림읽기를 떠올리게 하는 지은이는 옛 그림을 감상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 한시문을 자세히 풀이하면서 옛 그림의 숨은 뜻을 밝혀주고, 거기에 오늘의 시각까지 곁들여 풍성한 옛 그림 읽기를 제시한다.
옛 그림은 인문학의 덩어리다. 시서화가 일체를 이룬 옛 그림은 한 화가의 내면풍경을 넘어, 당대 지식인들의 문화감각과 중국의 선진 문화까지도 아우르며 태어난 거대한 조형물임을 알려준다. 가벼운 그림 읽기가 미술출판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전문가의 내공으로 일궈낸 심도 있는 옛 그림 읽기를 시도한 지은이의 노력이 반갑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그림 속의 시문을 샅샅이 탐색하되, 시문의 탄생 배경은 물론 인용구의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다시 화가의 마음을 진단하며 한 장의 그림이 가진 깊고 넓은 세계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읽는 순서는 이렇다. 우선 각 글의 앞머리에 나오는 그림을 보고, 그런 다음 지은이가 친절하게 설명하는 옛 시문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그림을 보며 이해의 폭을 넓힌다. 옛 사람의 마음으로 그림을 이해하게 되면, 이번에는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그림과 시문을,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그림은 모두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문학작품만은 조선의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이 중국 당나라 송나라의 명시문이고 중국의 옛 사상서나 역사서까지 포함돼 있다. 옛 우리 문인들이 한문으로 된 중국문학을 우리 것처럼 마음껏 누리고 향유했기에 당연한 일이다. 당시의 문화판도에서 중국의 고전은 중국이라는 한 국가의 전유물이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옛 그림이 시문을 담는 형태는 다양하다. 시문의 서사적 흐름을 따라가며 그것을 그림으로 그대로 옮긴 고전적 방법이 있는가 하면, 서정적 감동을 시와 그림이 하나가 되도록 시도한 그림도 있다. 시문에 묘사된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옮기려 노력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시문의 주제를 비유적이고 주관적으로 전달하려 한 경우도 있다. 또 시문이 나타내는 바가 추상적일 때는 그림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려 한 경우도 있고, 그림만으로 이야기 전달이 어려울 때는 시문을 그림에 보태기도 했다.
책은 시문이 그림과 맺는 관계보다는 그림이 나타낸 주제에 따라 7장으로 나뉘어 있다.
1장 ‘떠오르는 시정’에서는 옛 문인들이 감복하며 가슴 깊이 새기고 아꼈던 시문들을 그린 그림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시적 감흥과 시상의 깊이에 다가가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소식의 명구 “빈산에 사람 없고, 물 흐르고 꽃이 피네(公山無人 水流花開)”를 그린 최북의 「공산무인도」, 가도의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尋隱者不遇)”를 그린 장득만의 「송하문동자도」, 육유의 시 「한거자술(閑居自述)」을 그림 옆에 적어 넣어 그려낸 강세황의 「수석유화」, 두보의 시 「등왕정자(滕王亭子)」의 감동을 그림으로 옮긴 허필의 「두보시의도」, 왕유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이 적혀 있는 이인문의 「송하한담도」가 소개된다.
2장 ‘삶을 위로하는 문인, 배움을 권장하는 학자’에서는 동파선생 소식과 정절선생 도연명처럼 스타 배우처럼 우리 옛 그림에 자주 등장하고 사랑받았던 문인들을 그린 그림을 그들의 시문과 함께 만나본다. 또한 중국 남송의 철학자 주자선생 주희와 조선의 성리학자 율곡선생 이이처럼 조선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대학자가 등장한 그림을 만나본다. 소식은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적벽부도」에서, 도연명은 전기의 「귀거래도」와 정선의 부채그림 두 점에 등장한다. 주자선생은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산 계곡을 그린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율곡선생은 그가 구곡을 노래한 「고산구곡가」를 바탕으로 김이혁.김홍도.김득신 등의 당대의 뛰어난 화가들이 그린 『고산구곡시화병』에 그려졌다.
3장 ‘꿈속의 공간’에서는 옛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향, 부재하는 공간에 대한 크고 작은 꿈들을 다룬 그림과 시문을 찾아본다. 옛 사람들이 재현한 꿈을 보면서 역으로 그들의 현실, 그들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재밌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는 「몽유도원도」가 첫 번째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도원도’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하여 어부와 마을사람이 그려지지만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이 그림은 마을은 사라지고 산수만 남은 도원을 다루고 있다. 이런 황량한 분위기와 안평대군의 불운한 운명 때문에 오늘의 감상자들은 흔히 애절한 느낌으로 이 그림을 바라보기 십상이지만, 안평대군이 그림이 그려진 후 붙인 발문 「몽유도원도발」과 함께 이 그림을 독해하면 오히려 왕자의 풋풋한 패기와 포부가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운의 『빈풍도첩』은 사시사철 농가의 풍속을 읊은 『시경』의 「칠월」을 그린 화첩이다. 「칠월」은 농민의 수고와 농경의 실상을 학습시키는 데 쓰인 국왕을 위한 학습용 교재였다. 하지만 화첩에는 궁박한 농촌의 현실보다는 풍요롭고 백성이 복종하는, 지배자들에게 이상적인 농촌 풍경이 그려졌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 선비들이 꿈꾸었던 정원을, 백거이의 「지상편(池上篇)」을 바탕으로 그린 강세황의 「지상편도」를 통해 음미해보고, 이재관이 그린 「오수도」를 통해 조선후기 문인 홍길주가 꿈꾼 선비의 이상향 ‘숙수념’을 알아본다.
4장 ‘소리의 형상’에서는 ‘소리’라는 추상적인 요소를 시와 그림으로 나타낸 작품들을 감상한다. 먼저 중국 북송대의 문인 구양수가 쓴 「추성부」를 그림으로 옮긴 김홍도의 「추성부도」를 감상하면서 소리를 글과 그림으로 옮긴 특출 난 사례를 살펴본다. 지은이는 여기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오늘날 통용되는 문구를 지적한다. 「추성부도」는 자주 다뤄진 주제였는데, 근대기에 그려진 이 주제의 그림에서 가을과 독서를 연관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은 구양수의 「추성부」에서 가을소리는 선비의 마음을 심란케 해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였던 것이, 시간이 흘러감을 암시하는 가을소리를 들으면 더욱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도학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오늘날의 가을=독서의 공식이 정착했다고 분석한다.
최북은 신라 문인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의 3구와 4구를 담백하게 그림으로 옮겼다. 그 외에도 생황 소리를 그림으로 옮긴 김홍도의 「송하취생도」와 매와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심사정의 「호취박토도」가 소개된다.
5장 ‘문인의 심회’에서는 한 문인의 글과 그림이 한 화폭에 있어, 그 문인의 심회를 글과 그림에서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경우를 소개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의 「어락도」는 언뜻 보아 물고기 세 마리와 새우가 그려진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박제가가 『장자』의 한 문장을 써 넣음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차원이 열리게 된다.
김정희가 제자 이우선에게 쓴 편지에 그려넣은 「세한도」 또한 문인의 심회가 글과 그림으로 표현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예라 하겠다. 김정희의 글·그림은 한 점 더 소개된다. 바로 「불이선란」이다. 이 그림에는 그림을 그린 내력, 필획의 조형적 근거,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는 다짐 등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들어 있어 그림을 더욱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6장 ‘명산에서 얻은 감동’에서는 우리 산천을 그린 산수시와 산수화를 만난다. 우선 유명한 정선의 「만폭동도」와 함께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이병연의 한시 「만폭동」, 만폭동 바위에 새겨진 고개지의 시 ‘천암경수, 만학쟁류’를 감상한다. 또 윤제홍의 『학산구구옹첩』에 실린 「한라산도」를 소개한다. 이 그림에서 윤제홍은 백록담의 풍경을 단출하게 그린 후 그림의 여백에 빼곡하게 자신의 한라산 기행문을 실었다.
7장 ‘욕망과 인정’에서는 인간의 욕망 문제를 다룬 세 가지 시문과 그림을 다룬다. 첫째 조선초기 『삼강행실도』에 실린 자식의 효를 강조한 그림 「누백포호」 목판화를 통해 효와 열의 질서구조가 뒷받침했던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를 살펴보고, 둘째 『구운몽』 중 주인공 성진이 팔선녀와 돌다리 위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두고 19세기의 독자들이 소설 『구운몽』을 어떻게 이해하고 시각화시켰는지 살펴본다. 세 번째로 모란 그림을 많이 그려 ‘허모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허련의 「모란도」 그림을 통해 우리 문화에서 모란꽃이 어떤 의미로 소비되었는지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