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불량 국새 사건, 광화문 현판 균열 사건……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 속의 장인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가문은 왕궁의 모든 광채 나는 것에 참여했단다.”
재독 작가 강유일은 조선의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다시 묻는다. 우리가 멸망, 좌초, 실패로 기억하는 조선의 최후는 정말 그렇게 어두운 기억이기만 한가? 빛나는 정신 한 조각을 지키려 끝끝내 노력했던 이들을 너무 쉽게 잊은 것은 아닌지. 오래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작가의 낭만적인 과거 희구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종 황제의 마지막 장인 우숭린은 2010년의 우리가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0년, 우리는 부끄러운 사건들을 많이 겪었다. 가장 이름 높은 전각장은 사실 언론플레이로 만들어진 자로, 허울만 좋은 국새를 내놓았을 뿐 아니라 위조된 과거까지 가지고 있었다. 광화문 현판은 복원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균열이 생겨 가림막 뒤에 숨겨졌다. 이러한 최근의 오고 가는 비난 속에, 『황제의 칼데라』에 나오는 민족의 염원을 담은 순결한 황금 대보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못해 슬퍼진다.
좌초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사 뒤에 흐르는 정서는 기백 있으며, 품격 있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백 년의 시간을, 서울과 베를린과 시안과 갈라파고스를 가로지르는 작가의 솜씨 속에는 결연한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강유일은 “혁명은 새턴과 같아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라는 당통의 그 유명한 말을 빌려, 역사 역시 자기 자식을 잡아먹으며 진행한다고 차분히 말한다. 건국 20년도 채 안 된 젊은 공화국 대한민국의 어린 시민이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앞을 걷던 여학생이 이제 시대정신을 뚫어 보는 연륜 있는 작가가 되어 2010년 마지막 문제작을 내민다.
*“네가 이 옥새에서 내 이름을 지우지 않았더라면 네 목을 베려고 했다!”
고종 황제와 동갑내기 옥새 장인이었던 우숭린은, 경복궁 화재 후 새 옥새를 제작하면서 왕조와 민족을 향한 한 가닥 염원을 담아 비밀 작전을 구상한다. 원래의 합금 방식과는 전혀 달리 순결한 황금으로만 만들어진 옥새에는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는데, 유례 없이 파격적인 시대정신이 스며 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모종의 목적을 위해 몰래 경회루 누지 속에 내려진다. 20세기 말, 뒤늦게 다시 발견된 옥새와 함께 우숭린과 그의 아들, 손자의 지난한 역사가 다시 조명된다.
옥새 장인인 우숭린은 망명을 떠나면서, 여러 국적의 승객들이 타고 있던 칼멘호 갑판에서 일제 점령의 부당함을 알리려 육혈포로 자결하고 만다. 그의 유복자인 우현학은, 홍콩항의 부두 노동자로 자라 한국전쟁 때 종군 기자로 활약하다가 국무총리실 대변인이 되지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망명을 시작한 우난세는 아직까지 서울 화동을 다시 밟아보지 못했다. 그런 우난세에게 황실박물관의 전갈이 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삶에 대고 주저 없이 ‘예스’라고 말하리라.”
난세는 서울에 돌아가기 전, 할아버지 우숭린이 언제나 이야기했던 장안과 아버지 현학의 생전 마지막 목적지였던 갈라파고스에서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서울에는 35년 전, 망명 전날 종친부 옥첩당에서 소년 소녀로 약혼을 했던 능라가 기다리고 있다.
시안에서는 불멸을 꿈꾸었던 진시황과 그의 군사들이, 갈라파고스에서는 본연적인 풍광과 아름다운 거대 거북이들이 난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세는 화산 칼데라와, 그 칼데라에 사는 거북들을 통해 옥새의 우주를 지고 있는 거북을 떠올리고, 망명 생활의 상처를 씻어낸다.
난세는 이내, 멸망해가는 조선의 황제 고종과 동갑내기 옥새 장인이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어 불멸을 향했음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
책 속에서
“우리는 그때 부헨발트 수용소의 거대한 점호 광장 앞까지 뻗어 있는 ‘피의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던 부헨발트의 그 지점에선 저만치 동쪽에 있는 악마적인 생체 실험실과 화장장을 배경으로 그 유명한 괴테 나무가 바라다보였습니다. 그때 한 사내가 달려왔습니다. 수용소 기록실 남자였어요, 그가 말했지요. ‘남한의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답니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답니다.’ 그때……”
힐 교수는 날 바라다보았다.
“수용소 입구에 독수리처럼 솟아 있는 옛 감시탑 종각 스피커로부터 부헨발트 포로들의 장엄한 노래가 쏟아져나왔지요. 그 노래 가사는……”
“부헨발트, 너는 나의 운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삶에 대고 주저 없이 ‘예스’라고 말하리라.”
“당신은 아직도 그 찬가를 기억하는군요.”
“아버지가 번역해주셨지요.” _50쪽, 51쪽에서
1876년 겨울, 경복궁 대화재 이후 보수 과정에서 실종된 그 옥새 ‘국왕의 대보’는 그로부터 120년 후 그렇게 다시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궁궐 대화재의 그 겨울 이후 실종된 그 옥새가 바로 경회루 누지 아래서 한 왕조와 민족의 불멸을 그렇게 계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충격 때문에 학예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엄중한 국왕의 옥새가 감히 인면 문자를 바꾼 채 의도적으로 대궐 제왕보물처도 아닌 국왕의 호수 최심부 동쪽에 백 년 이상 안치돼 있었다는 그 충격적 예외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_127쪽에서
나는 다시 고꾸라지듯 땅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흙은 여전히 화산의 불과 동태평양의 물속에서 발효된 태고의 냄새를 실컷 풍겼다. 그제야 난 알았다. 현학이 죽은 이후 난 곧 망명 신청을 했고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35년간 망명중이었다. 망명 최초의 날부터 서양 학교의 세면대는 너무도 높았고 음식은 참을 수 없이 건조했으며 독일어 악센트는 단검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날부터 난 삶에 대한 분노와 중오를 ‘망명’이란 이름의 괄호 속에 담아 보관해왔었다. 목젖까지 악몽과 분노가 선적된 물컹하고 슬픈 컨테이너, 그것이 나였다. 그렇다. 나는 수십 년간 망명이란 질긴 음식을 씹으며 분노라는 수프를 마시며 살아왔다. 밤이 되면 천천히 삶에 대한 원한이 덧니처럼 솟아올랐었다. 죽어도 치료되기를 거절했던 그 상처들. _360, 361쪽에서
작가의 말
조선왕조 멸망 백 년, 나는 역사의 조난자인 황제 고종과 그의 전사들의 ‘좌초의 방식’과 ‘희망의 방식’에 대해 적고 싶었다. 황제의 전사였던 한 가문의 삼대에 걸친 망명과 객사, 그 처절하고 찬란한 좌초에 대해 보고하고 싶었다. 아니, 이 소설은 내가 십대에 아무 예감도 없이 걸었던 그 장엄한 길― 청와대, 경복궁, 중앙청에 던졌던 내 무정한 시선에 대한 수정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패자는 진실로 역사의 땔감인가. 역사라는 그 거대한 난파선 밑에서 좌초한 조난자, 즉 패자들이 저어준 그 ‘추상(抽象)의 노(櫓)’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이 지점까지 항해해 나올 수 있었을까. 그 무명의 난파자들이 희망이라는 지독한 거름을 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종족이 지금 바로 이 지점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 이 소설은 멸망 앞에서도 가차 없이 불멸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찬란한 좌초’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는 현실을 걷어차고 신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