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다시, 헤르타 뮐러의 언어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오스트레일리언
2009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타 뮐러,
상처 입은 시의 뼈로 써내려간 그로테스크한 삶의 잿빛 풍경!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헤르타 뮐러의 예리한 현실감각과 풍자적인 사회비판, 전체주의에 대한 거센 저항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장편소설이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핍박으로 가득 찬 ‘잿빛의 시대’를 통렬하게 형상화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티미쇼아라대학에서 영문학과 독문학, 루마니아문학을 전공한 후 공장에 취직해 번역가로 일하고 있던 뮐러는 어느 날 비밀경찰로부터 스파이 역할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뮐러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결국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다가 해고당했다. 그 후로도 뮐러는 계속 비밀경찰의 감시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서 뮐러는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운명을 빼앗기고 꿈속까지 파괴된 사람들의 암울한 초상화를 그려 보인다.
★ 헤르타 뮐러는 올 8월, 국제비교문학회 초청으로 ‘2010 세계비교문학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감시, 고문, 살해…… 개인을 광기로 몰아가는 독재의 트라우마
죽음의 공포 속에서 운명을 빼앗기고 꿈속까지 파괴된 사람들의 암울한 초상화
황폐하고 쇠락한 도시 변두리에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때 ‘노동영웅’을 꿈꿨던 그들은 이제 수척해지고, 피로에 찌들어 술과 다툼을 일삼는 야비한 삶 속으로 도피해 있다. ‘사회적 실험’이라는 정부의 비전과 약속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여교사 아디나는 학생을 토마토 수확 작업에 동원하는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말했다는 혐의로 교장에게 불려가 성추행을 당하고 비밀경찰에게도 요주의 인물로 찍힌다. 아디나는 면밀한 방식으로 위협을 받는데, 비밀경찰은 그녀의 집에 깔린 여우 모피 카펫에서 꼬리와 다리를 서서히 절단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다. 언제라도 그녀의 사생활에 침입할 수 있음을 은밀하면서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안전 면도날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안전 면도날을 싼 포장지를 풀어 무릎 옆에 놓는다. 그는 여우의 오른쪽 뒷발을 자른다. 그는 혀끝으로 검지에 침을 묻혀서 잘린 털을 바닥에서 훔쳐낸다. _안전 면도날, 199쪽
아디나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인 클라라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지낸다. 그러나 클라라의 애인이 비밀경찰 간부임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서먹해진다. 아디나는 그녀에게서 차우셰스쿠 정권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집단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메모지 한 장이 현관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디나가 읽는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
이웃집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계단에서 클라라의 하이힐 소리가 똑똑 울린다. 아디나는 발끝으로 메모지를 문틈에서 끌어당긴다. _사방으로 뻗어가는 도시, 300~301쪽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디나는 남자친구 파울과 함께 여우의 머리가 잘리기 직전, 절망적인 순간에 시골에 있는 친구 리비우에게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권 붕괴라는 혁명적 사건과 독재자의 몰락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다. 그리고 독재자의 몰락 이후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비밀경찰의 감시 시스템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 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켠다. 차우셰스쿠는 잠시 연설을 할 수 없었어, 그가 말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고함을 쳐서 그는 입을 다물었어. 경호원이 그를 커튼 뒤로 잡아끌었어. 아디나가 운다. 화면 위로 돌기둥의 네모진 받침돌과 창문 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중앙위원회와 그 앞에 몰려든 수많은 외투들, 수천의 외투들이 경작지처럼 희미하다. 그 위로는 외침 소리. _흑백 하늘, 332쪽
창문의 커튼은 끌어당겨져 닫혀 있다. 그들이 여기에 있었어, 파울이 말한다. 아파트 문은 잠겨 있다. 옷장 문이 열려 있고, 옷이 바닥에 놓여 있고, 책, 침대보, 베개, 담요, 레코드판이 주방의 타일 바닥에 흩어져 있다. 레코드판은 부서지고, 구둣발로 짓밟혔다. _얼어붙은 나무딸기, 343쪽
아디나와 클라라 주변에는 수많은 조연들이 있는데, 인물들은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은 전체주의의 억압 아래서 물질적 궁핍과 감정적 결핍에 고통받으며 도덕적 지향점을 상실한 상태다. 일주일 전부터 도끼가 두개골에 박혀 있던 남자의 이야기는 이들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재자는 도끼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미 그 상태(시스템)에 적응했기 때문에 쉽게 제거할 수도 없다. 머리에서 도끼를 제거하자 남자는 피를 흘리며 죽는다.
오늘 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병원에 왔어, 그가 말했다. 남자의 머릿속에 작은 나무도끼가 하나 있었어. 도끼자루는 마치 머리카락 속에서 자란 것처럼 머리 위에 서 있었지. 그의 머리에선 피 한 방울도 볼 수 없었어. 의사들이 남자 주변에 모였어. 여자는 남자가 일주일 전에 그렇게 됐다고 말했지. 남자는 웃었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어. 도끼자루만 잘라내야 합니다. 머릿속의 뇌가 도끼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도끼를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한 여의사가 말했어. 의사들은 도끼를 제거했어. 그리고 남자는 죽었지. _호두, 136쪽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제목은 루마니아의 속담에서 가져온 것이다.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더라도 독재자의 추종 세력과 그 시스템에 익숙해진 탓에 근본적인 정치 · 사회적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 전체주의 사회의 공포와 불안
아디나는 불안과 위협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공황상태에 빠진 영혼은 현실을 극도로 예민하게 감지한다. 인물들은 꿈속에서도 박해를 받는다. 루마니아의 비참함은 자연 속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인물들은 자연마저 위협적으로 느낀다. 아디나는 거리의 초록색 포플러나무 잎사귀에서도 위협적으로 흔드는 초록색 칼을 본다. 또 그녀는 해충과 곤충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본다. 인물들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비하할 때만 존재 가치가 있다. 뮐러는 이 소설에서 대단히 섬세한 묘사와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통해 총체적인 난관에 봉착한 한 국가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소상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은 원래 루마니아 감독 슈테레 굴레아의 영화 <여우, 사냥꾼>의 시나리오 기초 자료로 쓴 것이었으나 나중에 장편소설로 개작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많은 장면이 시나리오의 지문을 떠올리게 한다. 서른한 개의 장은 뚜렷하게 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오버랩되어 이어진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탁월한 언어감각은 이른바 ‘상처 입은 시’의 표정으로 드러난다. “소설은 훼손된 세계를 훼손된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이라는 프랑스 철학자 루시앵 골드망의 말처럼, 그녀는 공포와 가난으로 점철된 부조리한 시대를 그려내기 위해 시적이되 완전하지 않은 문장, 생채기난 언어를 이용한다. 또한 표면의 인상만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그 배후를 캐내도록 한다.
각 장은 세밀화처럼 섬세하다. 소설의 초반부터 수백수천의 이미지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다. 독자들은 시간을 가지고 참을성 있게 이 조각들이 소설의 중간 이후부터 퍼즐처럼 이어져 그림을 이루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뮐러는 단어와 사물 간의 불일치, 지시어와 대상 간의 괴리에 주목하여 대상 자체의 시선으로, 뒤바뀐 ‘낯선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때때로 뒤에 질문을 남기면서, 때로는 옛날이야기처럼, 때로는 동화처럼 드러난다. 이 특이한 문체야말로 뮐러 소설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 추천사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 스웨덴 한림원
헤르타 뮐러에게는 초혼(招魂)의 힘이 있다. 그녀가 쓰는 언어의 광휘는 실로 눈부시다. 르몽드
뮐러는 독재 체제하에서 일반인이 체험한 일상의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 체포, 고문, 살해에 대한 공포를 특유의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이것이 바로 뮐러의 예술이다. 디 차이트
뮐러의 작품들은 문학의 중요한 미덕을 겸비하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경계를 초월한 정의를 위해 항변한다. 슈피겔
독일어로 글을 쓰는 뛰어난 작가 헤르타 뮐러는 전체주의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시적인 상징과 리듬감 있는 산문을 연결시켜 훌륭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템포
그녀는 주제가 자신을 골랐다고 말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고. 그녀가 쓴 거의 모든 작품은 루마니아의 독재 시절 삶과 공포, 그리고 배반과 끊임없는 감시에 대한 것이다. 안데르스 올슨(작가, 한림원 회원)
● 지은이 헤르타 뮐러 Herta Müller
1953년 루마니아 니츠키도르프에서 태어나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이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가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 년간 노역했다. 나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를 침묵으로 지켜보았던 시골 마을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어린 뮐러에게 정체 모를 공포와 불안을 심어주었다. 이후 티미쇼아라대학에서 독일문학과 루마니아문학을 전공했고,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젊은 독일어권 작가들의 모임 ‘악티온스그루페 바나트’에 유일한 여성 멤버로 참여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82년, 루마니아 정부의 강도 높은 검열을 거친 작품 『저지대』로 문단에 데뷔했다. 1984년 베를린에서 재출간된 『저지대』는 유럽, 특히 독일 문단과 정치권의 이목을 끌었고, 루마니아 정부는 『저지대』를 금서 조치했다. 이어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뮐러는 남편이자 동료 작가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1987년 독일로 망명했다.
주요 작품으로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한 소설 『숨그네』 『마음짐승』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산문집 『악마가 거울 속에 앉아 있다』, 시집 『모카잔을 든 우울한 신사들』 등이 있으며, 아스펙테 문학상, 리카르다 후흐 문학상, 로즈비타 문학상, 독일비평가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2009년,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옮긴이 윤시향
1946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 쾰른대학에서 공부했다. 베를린자유대학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원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옮긴 책으로 『시체들의 뗏목』 『나는 어두운 밤 집을 나섰다』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클라이스트』 『햄릿 머신』 등이 있다.
???? 2010년 7월 26일 발행
???? ISBN 978-89-546-1203-6 03850
???? 128*188(양장) | 368쪽 | 13,000원
???? 책임편집: 강건모(redlily@munhak.com, 031-955-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