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말입니다, 전라도 사람들, ‘그래요잉’ 하는 소리 들으면 짜증부터 나요.”
누구나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옛날부터 심했다. 가령 위에서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말끝을 길게 늘이면서 쉽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지역에 발붙이고 살아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한마디 말로 그 지역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그중 가장 확실한 것은 언어이다. ‘말’이야말로 한 개인의, 한 지역의, 한 국가의 문화를 표현해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문화가 되는 유일무이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전라도 말의 ‘꽃심’
이 책은 전라도 출신 국어학자 김규남이 전라도 사투리를 중심으로 전라도 사람들만의 정서와 문화를 풀이해놓은 것이다. 방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론서도, 단지 사투리를 재미있게 모아놓기만 한 에세이도 아니다. 저자가 실생활에서 직접 부딪히며 만났던 사투리들을 전라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육성을 통해 들려주는가 하면, 단어 형성과정과 용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론적으로 엄정하면서도 전라도 사투리들이 생생히 살아 있다.
1부에서는 우리가 흔히 오해하게 되는 전라도만의 표현들을 풀이해주고 있다. 예컨대 앞에서 나왔던, 전라도 사람들의 ‘-잉’ 하고 말끝을 늘이는 버릇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겠다는 ‘으멍한(음흉한)’ 속셈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맛깔스런 표현일 뿐이다. ‘꾀복쟁이’라는 말은 어릴 적부터 옷 할딱 벗고 함께 뛰놀았던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죽마고우’나 ‘소꿉친구’라는 단어로는 대체할 수 없는 전라도만의 표현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는 전라도 사람들도 알고 보면 눈 오는 날은 ‘싸박싸박’ 걷고 비 오는 날은 ‘장감장감’ 걸어가며 무슨 일이든 ‘서나서나’ 할 줄 아는 여유 넘치는 사람들이다.
2부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비추어 그 시절 전라도의 풍습을 되살리고 있다. 1에서 6까지 적어놓은 분판에 삿짝(주사위)을 던져 말을 움직이는 ‘상육치기’는 지금의 고스톱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품위 있는 놀이였다. 대보름 밤, 이웃집 아이들과 ‘망우리(쥐불놀이)’를 돌리며 놀던 그 옛 추억들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지금 아이들의 모습과 비할 바가 아니다.
3부는 저자가 직접 녹음기를 들고 오지를 다니며 방언조사에서 만났던 할머니 할아버지 들과의 만남을 살아 있는 사투리로 옮겨놓았다. 이대흠의 산문집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가 촌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면, 여기에는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쳐온 눈가 짓무른 할머니들의 눈물이 느껴진다.
4부는 문학작품들 속에 나타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살펴보았다. 전라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판소리 ‘춘향가’와 ‘흥보가’는 물론, 이문구의 『관촌수필』, 정양 시인의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최명희의 『혼불』, 채만식의 『태평천하』에 나타나는 구성진 전라도 말들이 모였다. 특히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꽃심’이라는 표현은 최명희가 『혼불』에서 만들어낸 말로, ‘꽃의 심’, ‘꽃의 힘’, ‘꽃의 마음’, 즉 꽃처럼 낳고 싶고 맺고 싶어하는 간절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삶이 대체로 그렇듯 내게 방언은 고의적 미필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결과인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지만, 나는 청춘을 방언과 함께 보냈으며 지금도 방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방언은 학문의 대상만이 아니라, 시간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다져온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만나는 통로였으며, 역동적 변화의 굴레 앞에서 새로운 가치를 수용하며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목도하는 수단이었고, 한국 현대사 속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견디어온 개인사를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_‘책머리에’ 중에서
* 2007년 9월 3일 발행
* ISBN 978-89-546-0383-6 03810
* 153*210 | 288쪽 | 9,8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고경화(031-955-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