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그 낯설어진 곳에서의 유쾌한 길 찾기
지난 2000년, “강단의 철학보다 길거리의 사주관상이 더 철학적이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한형조 교수의 『왜 동양철학인가』가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나왔다. 이번 개정판은 “전후 책들의 연관을 고려하고 새 안목을 보”태어 새롭게 다듬어졌는데, 특히 2008년에 나온 『왜 조선 유학인가』와 『조선 유학의 거장들』의 연장선상에서 ‘주자학’ 챕터가 중점적으로 보완되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형조 교수의 글의 특장은 그 특유의 유려하고 개성 넘치는 문체에 있다고 할 것인데, 이번 개정판을 내면서는 “독자들이 멈추어 서서 생각할 공간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배려에서 “문장은 간결하게, 함축을 살리는 쪽으로 고쳤다”. 또한 챕터 없이 12편의 에세이가 모여 있던 종전의 구성은 접근, 제자백가, 주자학, 전망, 이렇게 4개의 챕터로 그루핑되어 동양철학의 방법, 가치와 사유, 전망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정리해주었다.
9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욱더, 현대사회는 소외와 물화가 만연해 있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는 새로운 해답을 동양철학에서 찾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동양철학은 현대문명으로 하여 더욱 깊어진 그 어둠을 헤치고 길道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소통되는 언어로” 대중과 동양철학 사이에 놓인 완강한 단절의 벽을 뚫고 그 현대적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는 이 입문서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소통되는 언어로 동양철학을 말한다. 조언은 분명하고 적실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버릴지 판정할 수 있다. 권위를 호도하고 신비를 조장하는 모호한 동양철학은 가라.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각하게 왜곡하고 방해할 뿐이니…… _초판 서문에서
접근, 이 낡은 학문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첫번째 장 ‘접근’에서는 “한때 우리의 삶을 규율한 코드였으면서도, 지금은 지구 저편의 사상과 문화보다 더욱 낯설어지게” 된 동양철학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방법의 길을 제시한다. 오늘날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 고전한문으로 되어 있는 동양철학의 텍스트가 지금의 대중들에게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의 학문적 소통을 위해서는 ‘번역’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자면 “텍스트의 언어부터 일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이는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소통되는 언어로 동양철학을 말한다”는 저자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제자백가, 춘추전국시대를 수놓았던 사유의 진경산수
두번째 장 ‘제자백가’에서는 동양철학의 대표적 사유인 제자백가, 즉 불교, 유교, 법가, 노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먼저 불교.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명에서 불교의 핵심을 본다. 불교는 진리를 묻는 사람들에게 “진리란 없다”며 일언지하에 잘라 말한다. 진리는 바로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으로, ‘나’를 완전히 비우고 분별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바로 볼 수 있을 때에야 본원의 순수한 에너지를 회복하고 진리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일상의 역설이다.
유교에서는 현대인들에게 다소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는 유교의 종교성, 초월적 실재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연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은 본래 도덕적 신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기 안의 그 신성을 깨닫고, 교육과 수양을 통해 본성을 닦아나가면 결국 초월적 실재를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유학은 먼저 자기 자신을 내적 본성에 맞게 가다듬는 자기 훈련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나가는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이었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욕망에서 바라보고,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조차 이해관계로 보는” 이 “불건강한 사회에서 일상 속의 자기 훈련을 강조하는 유교적 관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인식론적 전환을 위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분명하고 절실한 카드”라고 본다.
하지만 그 도덕성의 자발적 함양에 기대는 유교를 냉철하게 비판하는 사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법가였다. 당시 춘추전국시대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던 대혼란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자발적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믿는 것은 수주대토(守株待兎), 지나가던 토끼가 나무에 부딪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허망한 기대일 뿐이라고 믿었다. 인위적 형식과 제도를 통한 예(禮)의 교화를 중시하는 이 차가운 사상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설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여전히 유가적 사고에 갇혀 혈연, 지연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법가적 실용성인지 모른다. “서양이 과도한 합리주의적 전통으로 해서 가정의 위기와 익명의 소외를 경험한다면, 우리는 반면 너무 뜨겁다. 열을 내리기 위해서도 법가의 이념과 방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장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산문작가”였다. 장자는 당시 어지러운 혼란기에 당대의 학술을 넘어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의 필연성을 자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말라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이념이었다. 이를 저자는 ‘운명에의 사랑amor fati’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는 죽음 또한 자연의 축복이다. 그렇기에 장자는 스승이나 친구, 심지어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바가지를 두드리며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삶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자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떠나 온전히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응시하려 했다. 천지를 운행시키는 절대자인 자연과 더불어 호흡할 때, “그때 삶은 유쾌한 나들이로, 세상은 한바탕 축제의 무대로 화하는 것이다”.
주자학, 조선조 5백 년을 이끌었던 유교의 르네상스
세번째 장 ‘주자학’에서는 11~12세기에 일어난 유교의 르네상스, 새로운 유교인 주자학을 살펴보고 있다. 주자학을 집대성시킨 주희는 불교 형이상학에 맞서 중국의 오래된 생명적 자연관에 유가의 도덕 이념을 결합시킨 독특한 사유를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기(理氣)의 형이상학이다. 여기서 기(氣)는 중국의 오래된 자연관을 대표하고, 이(理)는 우주적 지평으로 확장된 유가의 도덕 원리를 집약한다. 이 장에서는 주자학의 골격인 기(氣)와 이(理)의 원론을 점검하고, 이 체계를 통해 표명된 주자학의 인간-생명론을 이해한 후에, 조선을 지배한 이 체계가 어떻게 근대와 불화하는지를 살펴본다.
동아시아의 자연관에서 “기(氣)는 합리적 과학적이기보다 신화적 형이상학적 사유의 산물”이었다. 옛날사람들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한 기(氣)가 자기 스스로 모였다 흩어지면서 우주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도가는 이처럼 “우주를 무대로 기(氣)의 계기들이 분화 교섭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조화와 질서를 형성한다”고 믿었지만, 유가에서는 이 현실을 구성하는 기(氣)가 중립적이거나 순수하지 않다고 보았다.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을 그대로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인문성의 자각이 기(氣)에 대립되는 이(理)를 적극적 지평으로 끌어올리게 한 것이다. “요컨대 기(氣)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면 이(理)는 ‘있어야 할 것’을 가리킨다.” 저자는 사물의 척도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의미까지를 포괄하는 이(理)에 가장 가까운 번역어를 ‘뜻’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주자학에서는 유동적인 기(氣)의 결합인 생명에도 위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중 가장 높은 종은 역시 자신의 내적 본성을 자각하고 스스로 발양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이었다. 주자학은 인간이 본래 완전하게 태어났으나 잠시 그 본성이 ‘마비’되어서 우주적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소외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 마비를 적절히 풀어주기만 하면 인간은 원래 부여받은 완전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은 다양한 방법과 훈련으로 마비를 풀어서 다시금 본원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나’의 건강을 위한 공부였다.
이러한 주자학은 조선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조선조 5백 년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지금 조선의 유학은 어디 있는가. 「조선 유학―근대와의 불화」에서는 근대화의 물결에 떠밀려 저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조선 유학이 왜 자생적 근대화에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전통의 실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저자는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 의미와 효용가치를 갖지 못하는 전통은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다며, 동양과 전통이 다시금 새 세대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면 제일 먼저 권위의식을 버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의 현재적 가치를 보기 위해서는, “주로 미시적 관점에서 작은 차이를 현미경적으로 밝히는 데 골몰해”왔던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거시적 전망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라는 조선 유학사 속의 첨예한 의견 대립도 거시적 층위에서 볼 때는 “주리적 틀 안에서 벌어진 사소한(?) 의견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통의 가치가 점점 퇴색되고 있는 지금, 이러한 마이너한 논쟁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와의 대비를 통해 동양을 유효한 인식의 지평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해와 해석의 거시적 지평이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이다.
전망, 동양철학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동양철학의 미래를 논한 마지막 두 장, 「아직 오지 않은 유교」와「한국 불교의 돌파구」에서는 지금 현실에서 유교와 불교가 갖는 위상을 점검하고, 달라진 시대와 환경에 이 둘이 나아가야 할 활로를 모색한다.
최근 몇 년간 유학을 근대와 접목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움직임 속에서 저자는 유학과 근대의 만남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즉, 유학을 근대에 적응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근대적’이고 ‘비현실적’인 지평에서 근대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놓자는 것이다. 저자는 “유학의 본원적 가치는 근대의 보조에 있기보다 그 도저한 전근대성에 있다”고 주장하며, “미래 유학은 한때 있었으나 또한 아직 오지 않은, 그 ‘비판적 학문’의 지평에 있다”고 역설한다. 지금 이 사회는 보이는 억압은 사라졌으되 보이지 않는 감시가 삶의 전반을 규율하고, 우리는 자신의 욕망마저 결정하지 못하는 예속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비참한 소외 속에서 철상철하 ‘자기’를 문제 삼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묻는 유학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예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유학은 바로 그 자잘하고 통속적인 일상 속에서 보상도 기대도 없이 올리는 자신을 향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선(禪) 이후 새로운 혁신을 통해 거듭나지 못하고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불교에 대해서는 병이 달라지면 처방도 바뀌어야 한다며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체계적인 수양 없이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돈오(頓悟)를 내세운 혜능 이후 한국 불교는 화두를 보아 깨달음을 얻는 간화(看話)에 의지해왔다. 하지만 그러한 수행법은 지금 이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의 활로를 ‘일상’과 ‘합리’의 지평 위에서 찾는 저자는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체계적인 수양과 방법을 통해 수행하는 점수(漸修) 위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렇듯 손쉽게 그 어려운 동양철학을 장악한 책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 책은 지나간 동양철학의 사상들을 단순히 설명하고 정리하는 입문서가 아니다. 한형조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여기에서 동양철학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적 가치이다. 이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위해 오래된 학문의 먼지를 털고 대중에게 소개해주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작업의 결과물이 바로 동양철학에의 초대라고 부를 수 있는 『왜 동양철학인가』와, 지난 2008년 아직 오지 않은 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왜 조선 유학인가』 『조선 유학의 거장들』이다. 그리고 그가 내놓을 다음 성과물은 금강경이다. 올해 상반기에 한형조 교수의 신작 『금강경,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금강경, 허접한 꽃들의 축제』가 출간될 예정이다. 대중의 시대, 철학의 시금석은 “적실성과 유효성”에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동양철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한형조 교수. 정재서 교수의 말대로 “이토록 좋은 책을 동시대에 손에 쥘 수 있게 된 우리 역시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형조 교수는 행복하다. 나라의 불행이 시인에게는 다행이라 했듯이 철학이 죽고 이념이 죽은 이 시대는 그에게 있어 진정 행운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아직도 더 많은 이들이 공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노자와 석가의 무익함을 훤전(喧傳)해야 한다.
한형조 교수의 글은 평이함 속에 심오함이 있고 심오함 속에 평이함이 있다. 실로 그는 고학(古學)의 전인(傳人)으로서 이 짧은 편폭에 동양철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담아냈다. 우리가 이렇듯 손쉽게 그 어려운 동양철학을 장악한 책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좋은 책을 동시대에 손에 쥘 수 있게 된 우리 역시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_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