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6세의 신예 송대방이 선보였던 시공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의 지적 스릴러 『헤르메스의 기둥』이 십 년 만에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역사 추리물도, 미술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십 년 전,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르네상스 미술과 연금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400여 년에 걸친 암투를 그린 『헤르메스의 기둥』은 당시 한국 문단에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보다 앞서 발간되었고, 재미나 깊이로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한국산(産) 팩션(faction)을 만나는 기쁨을 다시 누려보자.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인가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에는 이상한 기둥이 그려져 있다. 긴 목을 우아하게 외로 틀고 있는 성모의 오른편, 옷자락에 교묘히 가려진 기둥은 윗부분은 하나, 아랫부분은 여러 개, 즉 열주이다. 여러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이 미완성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파르미자니노는 이 그림에 사인을 했다. 일반적으로 사인은 완성작에만 하는 것인데도. 이 그림이 완성작이라면 파르미자니노는 이런 기둥을 도대체 왜 그린 것일까.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기둥을.
끔찍한 살인사건과 사라진 시체
이 비밀을 풀기 위해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영국령 지브롤터의 성 헤르메스 대학으로 유학 온 한국인 미술사학도 승호. 대학 내 논문 공모전에서 입상한 파르미자니노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날, 논문발표장으로 잭이라는 허름한 사내가 나타나 승호에게 파르미자니노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사라진다. 다음날 약속장소에 도착한 승호는 손발이 잘려나간 채 죽어가는 잭을 발견한다. 잭이 남긴 마지막 말은 “미셸……”. 누가, 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까.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으나 아무런 단서도 없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들 즈음 병원에 안치되어 있던 잭의 시체가 사라진다. 미셸에게 전하라는 알 수 없는 쪽지만 남겨진 채.
연금술과 현자의 돌, 그리고 파르미자니노
승호와 함께 유학중인 화학을 전공하는 여자친구 하영은 그즈음 마이클이라는 점성술사와 친분을 쌓게 된다. 하영은 마이클의 서재에서 발견한 고서 『미셸의 연대기』라는 책에 빠져든다. 소설의 한 축으로 전개되는 『미셸의 연대기』는 16세기,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해 스페인의 마드리드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부터 우정을 쌓은 학자이자 연금술사인 미셸이 후에 프랑수아 1세의 후원을 받아 연금술 실험에 몰두하고, 변성실험에 필수적인 현자의 돌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프랑스를 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리려는 야심을 가진 왕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진실한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교도국인 터키와 동맹을 맺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황제 카를 5세의 영토인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이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재정을 충당할 황금이었다. 따라서 연금술사인 미셸에게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변성실험을 장려한다. 계속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한 미셸에게 꼭 필요한 것은 수은을 황금으로 바꾸고, 순간과 영원을 소통시켜 영생불사를 가능하게 하는 현자의 돌. 그는 과연 현자의 돌을 얻었을까.
이탈리아 북부 도시 파르마의 화가 파르미자니노는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나타내 일찍 화가로 유명해졌다. 그는 37세에 지독한 설사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는데, 일각에서는 수은중독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역시 연금술에 열중했는데, 그가 현자의 돌을 발명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만약 그가 연금술에 성공했다면 그 비밀은 어디에 기록했을까. 혹시 수수께끼 같은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기둥 뒤에 숨긴 것은 아닐까.
진실은 때론 모순과 경계 위에 존재한다
일자와 다자, 선과 악, 삶과 죽음, 도덕과 쾌락…… 연금술은 이 모든 반대되는 것을 결합해내 황금으로 바꾼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것은 경계의 신 헤르메스이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고, 모든 변화를 주관하는 신 헤르메스는 따라서 연금술사의 신이기도 하다. 20세기 말, 지브롤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승호와 16세기, 연금술 실험에 몰두하는 프랑스 출신의 연금술사 미셸.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 두 사건과 인물을 연결하는 고리는 무엇일까. 헤르메스, 그리고 파르미자니노. 이것이 힌트이다.
『헤르메스의 기둥』은 놀라울 만큼 지적인 소설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찬란하고 풍요로운 시대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가 소설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연금술의 이념과 성당기사단의 역사, 성배와 어부왕의 전설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소설의 단단한 육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영채(문학평론가)
현자의 돌을 둘러싼 누대의 암투들이 파르미자니노의 그림 <긴 목의 성모> 속에 압축되어 우리의 눈을 기울어지게 하고 있다.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당신은 연금의 구리 항아리 속에서 타오르던 불사의 신화들이 꿈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장은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