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체, 화가 클림트에게 반하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훔친 미술의 상상력
쇠라의 점묘주의와 미소니의 니트ㆍ저드의 미니멀리즘과 프라다의 원피스
달리의 초현실주의와 스키아파렐리의 목걸이ㆍ콜더의 모빌과 라바네의 체인 드레스
워홀의 팝아트와 웨스트우드의 블루진드레스
미술과 패션의 ‘진짜’ 연애
패션이 단순한 ‘의복’의 개념을 떨쳐낸 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이제는 ‘패션도 예술이다’라는 말이 구태의연하게 들릴 정도로, 예술의 영역에서 패션을 읽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패션과 미술의 관계도 마찬가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순수 미술 작품만을 취급해오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루브르 미술관 등이 패션 디자이너들의 전시를 선보이기 시작하며 인식의 전환을 예기했고, 미술가들 역시 패션 컬렉션을 위한 세트를 만들거나 윈도 디스플레이 등에 참여하면서 교류에 활기를 더했다. 또한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탈장르 현상이 일면서 두 장르 간의 벽 자체가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는 듯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시상 제도 등을 마련해 미술가를 후원하는 패션 브랜드들이 점차 늘고 있어 실생활에서도 충분히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은 이렇게 패션이 예술의 영역에 유입되기까지의 과정과 다양한 측면에서의 미술과 패션의 교류를 그린 짧은 보고서다. 중세시대의 건축양식을 차용한 신발과 모자에서부터 저드의 미니멀한 설치조각을 닮은 프라다의 원피스까지, 15명의 미술가와 15명의 패션 디자이너가 함께 걸어 남긴 족적을 꼼꼼히 추적했다. 복잡한 미술 사조나 시대적 배경, 패션의 기본 원리 같은 이론적인 설명은 최대한 함축하고, 그 둘이 어떻게 만나 어떤 결과물을 탄생시켰고 이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뒷소문만 무성했던 미술과 패션의 교류가 철저한 현장 검증을 거쳐 그 적나라한 실체가 눈앞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어느 특정 타입에 치우치지 않은, 보다 실제에 가까운 교류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 대상 선택에도 신중을 기울였다. 이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브 생 로랑의 ‘몬드리안 룩’처럼 미술가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조형적인 차원에서의 교류, 미술의 경향에 따라 소재를 달리하거나 재단 등의 제작 방법에서 변화를 시도한 형식상의 교류, 미래주의나 미니멀리즘의 경우처럼 미학적 개념을 공유한 개념상에서의 교류 등 다양한 샘플 제시를 통해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도록 했다.
‘명품’을 입는다는 것? ‘미술’을 입는다는 것!
미소니, 베르사체, 프라다, 이세이 미야케, 구치 등 소위 ‘명품’으로 통하는 패션 브랜드를 주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동안 브랜드의 네임 밸류에만 의존해 엄연히 한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긴 ‘작품’을 값비싼 ‘상품’으로만 인지했다면, 이 책은 디자인에 영감을 제공한 미술 작품을 통해 그 본질을 보게 함으로써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이를 테면, 색채 원근법 개발로 회화사의 흐름을 바꾼 쇠라의 점묘화는 미소니 니트에 숨은 색 조합에 대한 비밀을 읽게 하고,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베르사체의 옷도 클림트의 그림을 통해서라면 ‘여성의 관능미’라는 코드로 재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저드의 조각은 역삼각형 로고로 유명한 프라다 백에서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발견케 하고, 실레의 그림은 섹시한 구치 드레스에서 에로티시즘의 역사를 읽게 해준다.
미술을 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는 데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특히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근?현대 미술은 좀체 형상은 알아볼 수 없고 의미나 개념만 거창해 상세한 해석이 뒷받침돼도 부담만 가중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더 익숙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함께라면 접근도, 이해도 훨씬 수월하고 직접적일 수 있다. 미술을 통해 패션의 본질을 이해하는 동시에 패션을 통해 미술을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는, 이른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게 하는 매우 유용한 책인 셈이다.
‘쉬어가는 페이지’들도 이 책의 별미다. 화가들의 그림에 푹 빠져 아무런 변형 없이 그 자체를 옷에 옮겨놓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이야기(「캔버스에서 드레스로」), 반대로 패션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창조한 미술가들의 이야기(「미술이 사랑한 패션」), 미술을 마케팅 아이템으로 활용하거나 젊은 미술가들의 창작을 후원하는 패션 브랜드들의 아트마케팅에 관한 이야기(「상품에 미술의 혼을 싣는다」) 등은 식사 중간에 가볍게 입맛을 돋궈줄 새콤한 피클 같은 역할을 한다.
패션은 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은 ‘카피 왕국’, ‘세계적인 유명 디자이너가 부재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겨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흔히 패션 디자이너라면 서양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화가 천경자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디자이너 설윤형, ‘뜨거운 불덩이 같은 고갱의 에너지’를 너무 사랑해 손수 캔버스에 고갱의 그림을 모작하고 그것을 텍스타일로 만들어 헌정했다는 박윤수, 마네나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교과서로 삼는다는 박지원 등 한국 디자이너들도 주목 대상으로 다뤘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패션 브랜드들의 아트마케팅에 관해 설명할 때는 국내 의류ㆍ잡화 브랜드인 ‘쌈지’를 대표 사례로 들어 미술과 패션의 교류가 단지 ‘남의 나라 일’이 아닌, 지금 여기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임을 실감케 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패션ㆍ미술용어가 한눈에, ‘친절한’ 용어사전
책 뒤편에 부록처럼 마련한 ‘용어사전’은 본문에 언급된 패션과 미술에 관련한 용어들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내용과 무관한 부수적인 개념과 용어 설명은 최대한 생략하고 꼭 알지 않으면 안 되는 핵심적인 것만 추려, 독자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한자리에 모아두었다. 또한 본문과 상관없이 읽어도 패션과 미술에 대한 사전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쉬운 단어만을 사용해 간략하지만 성실하게 풀이했다.
장르와 장르의 행복한 연애, ‘마이 러브 아트’ 두번째
이 책은 ‘마이 러브 아트’ 시리즈의 두번째 편이다.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 안에 숨은 미술의 자리를 찾아보자는 취지 아래 기획된 아트북스의 첫 시리즈물로, 얼마 전 제1편인 『영화가 사랑한 미술』이 스타트라인을 끊었다. 이 책은 「타이타닉」, 「취화선」 등 17편의 영화와 그에 관련한 17점의 미술 작품을 짝지어 영화와 미술의 관계를 집중 조명한 국내 최초 저작물로, 다양한 방송 매체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미술과 기타 예술 장르의 교류를 살핌으로써 견고한 장르의 벽을 허무는 ‘마이 러브 아트’를 통해 독자들은 각 장르의 또다른 매력을 발견하고 미술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