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피안감성』 이후 최근의 『허공』까지 오십 년, 고은 시의 정수!
시인이자 소설가 김형수가 고은 첫 시집 『피안감성』(1960)에서부터 최근의 『허공』(2008)까지 전작을 아울러 고은 시의 정수라 할 만한 대표시 66편을 추려 묶었다. 잘 알려져 있듯 고은 시인은 조로와 요절이 잦았던 우리 문학사에서 여전히 경이로운 현재진행형으로 갱신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시인이다. 한 명의 작가가 기백 권의 이르는 방대한 저서들을 펴낸 유례를 이 땅에서 찾아볼 수 없고, ‘속수무책’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상상력 또한 엄청나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한 권의 시집으로 고은 미학을 개괄하고, 그의 문학적 유골로 추정될 몇 토막을 추려보는 것은 어떨까. 고은 대표시 모음집 『오십 년의 사춘기』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탄생했다. 『오십 년의 사춘기』는 1950년대 말 전후 세대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래, 한국 현대시사 반백 년을 직관과 영감의 만년필로 쾌주해온 고은 시인의 시세계를 한 권으로 조망해볼 수 있는 특별한 시집이다.
고은 시인의 생애는 파란만장하다. 일제시대 소년기를 보내며 모국어를 몰래 익혔고, 군산중학교 재학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다. 세 번의 자살시도, 정규교육을 작파하고 입산, 스님이 됐다가 시인이 돼서 환속했고, 결혼도 했다. 그러면서 생의 한 뭉텅이는 처절하도록 고스란히 민주화운동에 바쳤다. 과연 그 스스로 ‘광기와 질풍노도의 삶’이라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삶이었다. 김형수는 이러한 삶의 파란과 신명에 뿌리를 둔 고은의 시, 고은의 영혼을 ‘오십 년의 사춘기’로 명명하고 시인의 작가적 생애를 초.중.후기 순으로 나누어 제1부 ‘집을 버리다’ 편, 제2부 ‘외치다’ 편, 제3부 ‘다시 길을 가다’ 편 등으로 제목을 붙였다. 특히 제4부 ‘많은 사람들(만인보)’ 편의 수록작을 추릴 때는 더이상 털어낼 수가 없어서 눈 감고 흔들어버렸다며 이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은 시도였음을 밝히고 있다. 고은 문학 세계를 알고 싶은 독서가들, 시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최전선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각급 교육기관에서 시 창작을 수업하는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유용한 시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십 년의 사춘기
―한 ‘늙은젊은’ 시인의 시적 자화상
제1부 ‘집을 버리다’ 편은 고은의 초기 시를 다룬다. 한국전쟁에서의 1960년대 고은의 시는 방황과 좌절 의식, 죽음에의 집착 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고은의 이 같은 특징에 주목하여 그의 초기 시를 허무주의로 부르고 있다. 특히 초기 고은 시에 지배적으로 드러난 ‘바다’의 이미지는 거부하기 어려운 생의 실존적인 공간이면서 그의 시를 탄생시키고 성장하게 하는 시적 체험과 형상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때때로 선잠 깬 기일忌日의 자갈길은
지난날 어허어허 내 상여 소리에 이르고
바다는 저 달이 혼자 떠 있지 않도록
조천朝天 바다 사리 때 고기들을 숨기고 있다.
―「겨울 달빛」 중에서
고은에게 바다는 시를 낳는 체험의 원형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의 바다는 언제나 회상 속에만 있다. 추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시적 오브제로서 바다는 시인에게 삶의 극점으로 인식된다.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바다가 저에게 자꾸 달려오려고 애를 썼으나
저는 조금씩 물러날 뿐 다가가지도 못하고 바다는 그곳에서 바다일 뿐이었습니다
―「사치奢侈」 중에서
제2부 ‘외치다’ 편은 고은의 중기 시를 다룬다. 시대적으로 분류한다면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다. 초기 시를 지배한 절망과 부정의 상상력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현실과 역사, 타인과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로 전이되어 그 폭을 넓히게 된다. 그 계기는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신문기사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을 알게 된 것이었다. 시인은 한 가난한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무수한 시간을 방황과 허무주의적 탐닉에 빠져 있었던 사실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된다. 특히 다음의 시는 그의 70년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으로 자주 거론된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화살」 중에서
또한 그는 어떤 일시적 이데올로기나 정치권력에 의해서도 분리될 수 없는 민족적 공동체의 정서를 노래하기도 한다.
아버지 아직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소금장수이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제시대 소금장수로
이 땅을 짚신으로 지까다비로 떠도신 아버지.
―「성묘」 주에서
그런가 하면 시인은 다음의 소박한 시에서 눈 내린 보리밭을 뛰노는 개,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곰이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데, 이 시를 통해 우리는 탈속과 해탈의 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눈 내린다
마을에서 개가 되고 싶다
마을 보리밭에서 개가 되고 싶다
아냐
깊은 산중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곰이 되고 싶다
눈 내린다
눈 내린다
―「눈 내리는 날」 전문
제3부 ‘다시 길을 가다’ 편은 『허공』(2008)을 포함한 고은의 최근작들을 다루고 있다. 민주화운동 시절 자신이 보여주었던 시적 위상에 대한 자기반성과 과거에 대한 회상, 그리고 시인으로서 삶의 방향 모색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는 이탈리아에 번역되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던 시집 『순간의 꽃』에서 추린 짧은 시들이 눈길을 끈다. 또한 한국 현대시사 반세기를 걸어온 자신의 삶을 토로한 시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순간의 꽃」 중에서
운다
이 멸망 같은 적도 인도양 복판을 벗어나며
지난 오십 년을 운다
칠천 톤 참치배 뱃머리로 운다
―「인도양」 중에서
제4부 ‘많은 사람들’ 편은 우리 민족 인물 하나하나의 의미에 대한 시적인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만인보』에서 추린 시들을 모은 것이다. 1986년 신군부의 정권탈취 과정에서 내란 음모죄와 계엄교사 혐의로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감방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구상한 이 거대한 기획 시집은 당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어린 시절의 환경과 자신이 지나온 시대의 사람들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기초가 수립된다. 1권 서문에서 시인 자신이 『만인보』의 의미를 ‘민족을 개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납하는 수작’이라고 밝힌 이 연작은 올해 30권 완간을 앞두고 있다.
『만인보』는 시적 원리나 방법에서도 매우 독특한 특질을 보여준다. 등장인물의 시점과 화자의 시점, 그리고 시인의 시점 등이 교차되면서 시적인 흥미를 더하고 있으며, 이야기의 형식을 빌린 경우도 있어 때로는 서사적인 울림마저 준다.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평범한 생활인의 모습, 현실과 역사의 문제, 종교적.초시간적인 인물에 대한 탐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만인보』의 개성적인 특질이 잘 드러난다.
제기럴 것
남 안 간 군대 갔다 왔는가
남 안 간 군대 가서
다리에 총알 박혀 빼내고 왔는가
늘 상이군인
상이군인 하고
상이군인 팔고 다녔다
이달봉이란 놈
―「상이군인」 중에서
『만인보』는 이처럼 한국적 삶의 전형을 사는 평범한 인물로부터 역사, 종교 등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만나고 기억하고 있는 무수한 인물들을 시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시인의 삶이 단순히 실존적인 범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그리고 초월적 지평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관계의 그물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대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고은의 자취는 신작로도 이정표도 없이 황야를 가로지른 한국 야성사의 도전과 고독 속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미 있었던 길은 혼자 걸어도 수많은 발자국이 동행하지만 길 없는 광야는 오직 혼자인 자의 그림자밖에는 없다. 시력(詩歷) 오십 년! 그 머나먼 시간 속을 고은은 루소처럼 늘 ‘체제, 제도와 함께’가 아니라 ‘홀로’ 걸었다. 그러면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인 듯 그가 저잣거리에 흩뿌려놓은 무수히 많은 축복과 모멸의 시간들은 고스란히 한국 현대시의 나이테가 되었다. _엮은이 김형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