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 진실을 말하고, 또 거짓말을 하기 위해
네 개의 손을 가진 화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들!
어린 시절 즐겨 읽는 『소공녀』에서 주인공 세라가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특별한 인형 에밀리가 걸어 다니며 말도 할 것이라고 짐작한 주인공의 상상에 공감한 기억을, 많은 사람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어린 마음에 좋아하는 인형을 몰래 곁눈질해 보기도 했을 테다. 또 인기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 기숙사의 벽에 걸린 그림들은 사람에게 말을 할 뿐 아니라, 그림과 그림 사이를 왔다 갔다 옮겨 다니기도 한다. 인형과 그림이 말을 한다는 상상은, 그것이 무생물이되 공들여 만들어진 물건에 혼이 깃든다는 생각에서 연유할 것이다. 특히 그림은, 더욱이 그것이 거장의 손끝에서 나왔다면, 화가의 노력과 애착, 그리고 그를 통해 빚어낸 ‘예술성’을 담고 있기에. 어떤 그림들은 실제 귀를 통해 듣는 것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마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그림이 정말로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사이드의 『그림의 목소리』는 바로 그림이 목소리를 얻었다면,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림들은 자기의 이력을, 내밀한 비밀을 사람들에게 털어놓는다.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추악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정도로 슬픈, 또 찌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에로틱한 이야기들을.
지난 수십 년간 회화작품은 물론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글을 써온 지은이는 미술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작품에서 연상되는 주관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품 속 인물이나 풍경, 또는 색채들이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주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사이드의 글은 미술과 문학이 새로운 지평에서 만남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들
처음 우리를 맞이하는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다. 당시의 미국적 삶을 가장 잘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 호퍼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그 그림. 거리에는 인적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등대처럼 불을 밝힌 한밤중의 식당 안에, 손님들이 앉아 있다. 우리를 향해 뒷모습을 보인 채 앉아 있는 신사 한 명과, 그와 떨어져 앉아 있는 한 쌍의 남녀, 그리고 식당 주인. 사이드는 이 한 쌍의 남녀에게 목소리를 주고, 우리는 이제 그림 속 인물들이 나눴을 법한 대화의 한 장면을 듣게 된다. 아마도 불륜관계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남녀는, 남의 눈을 피해 늦은 밤 식당에서 만났다. 그렇게 만났지만, 이들의 대화는 행복에 겨워 있지도,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림에서 가까이 붙어 앉아 있으면서도 앞만 쳐다보고 있는 이 남녀의 묘한 거리감이 보여주는 바로 그대로.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모자라도 좀 벗으라며 애꿎은 트집을 잡아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 모자 때문에 우리가 더 쓸쓸해 보인단 말이야.”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이라면 쉽게 수긍이 갈 테지만, 무생물을 그린 그림이거나 추상화는 어떨까? 그 또한 ‘말’할 수 있을까? 사이드는 육교에게도, 그리고 추상화 속 ‘색채’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한다. 파울 클레의 「육교의 혁명」에서, 마치 다리만 있는 새로운 생물인 것처럼 보이는 육교들은 굳은 어조로 세상에 선전포고를 하고, 마크 로스코의 「무제-붉은색 바탕 위에 파랑, 노랑, 초록」에서 색채들은 이민자였던 마크 로스코, 영어에 서툴렀던 그가 색채를 통해 비로소 말하는 법을 배웠노라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풍속화의 대가 피터르 브뤼헐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 「두 마리의 원숭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글프기까지 하다. 바다가 보이는 총안(銃眼)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두 마리 원숭이는, 자신들을 묶어버린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은 원숭이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지만 그들에게 먹이를 주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유를 잃고 앞날의 희망을 잃어버린 노예들이 대개 그렇듯, 원숭이들은 역설적으로 적이어야 할 주인에게 의지해버린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치겠어요? 만일 그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먹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겠느냐고요.”
상상력에 크게 의존한 글들이지만, 행간에서 실제 화가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점도 재미있다. 로댕이 그린 스케치를 보고 쓴 글에서 저자는 이 거장 조각가와 평생을 함께하며 자식을 낳고 작업을 보조한 여성, 하지만 죽기 겨우 2주 전에야 로댕과 결혼한 로즈 뵈레를 떠올린다. 또 난쟁이였던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의 「등을 대고 누운 여인(피로)」이라는 스케치를 보면서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사창가를 더 편하게 여겼고 창녀들의 친구가 되었던 로트레크의 사생활을 엿보는 식이다.
현재로 돌아온 화가들
1부의 주인공이 직접 말하는 그림들이었다면, 2부에서는 이제 세상을 떠난 화가들이 현재로 돌아와 말을 건넨다.
지극한 슬픔을 형상화해 유명한 초기작 「슬픔」을 두고, 고흐는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시앵이라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녀는 못생기고 흉측했지만 나에게는 꼭 어울렸다”고. 『이탈리아 기행』이라는 걸출한 기행문학을 낳은 괴테의 여행에 잠시 동행했던 화가 티슈바인은, 창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의 괴테 그림을 그리면서 괴테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한다. 지은이 사이드의 상상력에서 태어난 티슈바인은 괴테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가 에고에 가득 찬 인간이었고, 자신으로 그저 완결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모든 것을 차단한 듯 보이는 완고한 뒷모습이었노라고.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 소개돼 국내에도 알려진 유대인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대인 소년 자키를 그린 「거리에 서 있는 자키」를 두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특히 이 그림은 지은이 사이드가 처한 상황이 겹쳐져 있어 흥미롭다. 사이드 또한 이란 출생으로서 정치적 망명자로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일한 자화상 「마술사」는 네 개의 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마그리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마그리트의 입을 빌려, 사이드는 화가에게 네 개의 손이 필요한 이유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하고,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사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그림 여행
지은이 사이드의 서술은 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함축적이어서 울림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울 때도 있다. 때문에 한국어판에서는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시와 산문, 사실과 상상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사이드의 글 속에서 느낀 것과 실제를 비교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말미에 해설을 쓴 독일의 예술사학자 우베 플레크너는 학자라면 그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시각적인 것을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므로 둘 사이의 불일치가 언제나 생길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이 모순적 관계 때문에 직업적인 회의마저 들 때가 있노라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드의 시적인 표현들이, 학자들이라면 학문적인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취할 수 없었던 자유로움으로 지은이의 경험과 화가의 경험 그 모두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쓴다. 그럼으로써 그림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감춰져 있던 진실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고통과 회의를 느끼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관찰하는 그림의 모델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고통과 회의를 느끼며 예술가들은 이 그림들을 만들어냈고 색채와 형태를 통해 인물들은 물론이고 추상적인 세계까지도, 우리가 역사적 진실 너머까지 감동받게 해주는 인물과 세계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 사이드의 그림에 관한 텍스트들은 시적 방식으로 그림과 언어 사이의 심연을 극복하며 과거의 예술작품들을 우리의 현재 속으로 번역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림을 학술적으로 관찰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거리감에 관한 회의에 찬 소리를 들을 필요 없이 예술작품 속에 몰두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을 관찰하는 일 속에 얼마나 큰 행복감이 자리하게 되겠는가.” ―우베 플레크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