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맞서 노동자, 농민의 현실을 그려온 소설가 김남일이 산문집 『책』을 펴냈다. 한 소설가의 책과 함께한 인생의 내밀한 기록을 담은 『책』은 작가의 첫 산문집이자 ‘산책길’ 시리즈의 첫 권이기도 하다.
한 소설가의 책과 함께한 인생, 그 내밀한 기록
어린 시절 누나의 책꽂이에서 본 빨간색 표지 『소월시집』은 그 속에서 설핏 떨어지던 빛바랜 은행잎만큼이나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가한 휴일 오후, 어쩌다 옛날 소설책을 꺼내 표지를 들추자 나타나는, 법무부 관인이 찍힌 ‘독서열독허가증’은 내 젊은 날의 방황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술자리에서 모처럼 김지하의 『황토』가 화제에 오르면, 지금은 지방대학에서 조용히 늙어갈 벗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적조했구나, 벗이여. 그럴 때 책은 두루 추억이다. 세배를 간 노시인의 집에서 만난 서가는 그것 자체로 한국문학의 위엄이다. 시골 우체국에서 네루다를 끼고 온 중년 여인을 보았을 때, 히말라야 산속 로지에서 마르케스를 읽는 서양 여자를 보았을 때, 나는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때 책은 좌절된, 그렇지만 아름다운 욕망이다.
어린 시절 작가를 매혹했던 서점의 작은 서가, 젊은 영혼을 뒤흔들었던 ‘시뻘건’ 불온서적들, 앞이 보이지 않는 어지러운 시대에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책들에 관한 이야기는 애서가의 역사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용돈이 생기면 어김없이 서점으로 달려갔던 소년기, 청계천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조세희의 연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실린 잡지를 사모으던 청년기,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7년치 종이신문, 중국어, 베트남어, 티베트어, 몽골어, 라오스어에 이르는 각종 사전 수집벽까지, 책에 대한 사랑을 넘어 책 자체가 인생이 된 한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부 ‘내 마음의 불온서적’은 ‘시뻘건’ 무크지 『실천문학』과 김지하의 『황토』, 신경림의 『농무』 등 젊은 시절 접했던 수많은 불온서적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한 부를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문학.노동문학 작가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과 베트남의 상처난 역사적 관계를 성찰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주도해 민족문학의 경계를 넓혀온 그의 진지하고 치열한 작가적 이력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지면에서 그는 “80년대에 내가 쓴 소설의 마지막은 ‘함께 어깨 걸고 스크럼 짜 앞으로 나아갔다’는 식으로 끝난다. 그때는 그렇게 낙관주의자였는데 지금은 세상이 모순덩어리고 조금 두드려 고친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 가벼워지는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전체적인 세상을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자세를 유지하고자 한다. 『책』에는 한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았던 작가가 들려주는 생생한 역사와 미래에 대한 진지한 전망이 담겨 있다.
어쩌면 구닥다리만 모았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향기로운 ‘클래식’투성이입니다. 혼돈의 시대에 작가의 인생을 거세게 흔든 ‘영혼의 앨범’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소개된 책들과 작가의 곡절은, 또 누군가의 인생을 강력하게 흔들 개연성이 충분해 보입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책을 冊으로 쓰자고 말합니다. 冊은 버튼 하나로 해결하는 정수기의 냉수가 아니라, 두레박으로 건져올리는 우물물을 닮았습니다. 그 우물엔 시대정신이 고여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넘기며 웅장한 ‘종이 冊의 운명교향곡’을 들었습니다. ―고경태(『한겨레21』 편집장)
* 초판발행|2006년 5월 30일
* ISBN|89-546-0155-3 03810
* 153*210|256쪽|8,500원
* 책임편집|조연주, 김송은, 김경미(031-955-8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