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이래 오 년 간격으로 세 권의 시집을 발표해온 정한용 시인이 오랜 만에 문학동네에서 새 시집 『흰 꽃』을 펴냈다. 초기 시집에서 냉소적이고 거칠게 느껴지던 고통과 상처의 시어들은 유순해지고,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생의 형상들은 더욱 다양해졌다. 이러한 변모가 단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한 해가 넘도록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한 채 “텅 빈 속절없음이 지속”(「간다, 봄」)되기도 했다는 고백과 칠 년이라는 긴 공백기, 그리고 아이오와대 국제창작 프로그램 참가와 ‘빈 터’ 대표 활동 등 시인의 경험들을 생각해보면 그에게 시쓰기의 의미 자체가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비판시에서부터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과 주제가 담긴 이번 시집은 독자들에게 저마다 안고 있는 물음에 따라 그 빛깔과 깊이를 달리하며 다가갈 것이다.
그럼에도 생이여, 다시 한번!
시집 1부의 주제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존재의 무의미’와, 그래도 살아가는 그 양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하염없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찾아온 것인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하지만 “누란으로 가는 길에/누란은 보이지 않고/누란의 허깨비들 웅성거림만 들려/나는, 길을 잃었다”(「누란과의 대화」)고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답을 구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메아리조차 없는 내면의 외침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시인에게 그런 삶은 “하루하루 물렁물렁하게 지나간 것이/마치 철근이나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드디어는/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유월 일기」)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 존재란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한가운데/눈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는”(「삼나무에 내리는 눈」)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그는 “무엇을 지적하든, 그것은 결국 우리 뜻 바깥이 되므로/내가 여기 선 연유가 생을 미는 것이 된다 해도/다시 날카로워진 말에 살을 베인다 해도/마침내”(「시월이 부서질 때」)라며 어떠한 기대를 품고 있음을 내비친다. 그 기대란 차마 버리지 못한 찌꺼기 같은 것이 아니다. 풀 한 포기조차 허용하지 않는 만년설 속에서 “손톱만한 흰 꽃을 발견”하고는 “설산 위로 해 떨어지고 내려갈 길 또한 아득했지만, 내 회귀의 풀숲은 아직 뜨거웠다”(「수목한계선」)며 희열에 차 외치는 시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깨달음이 맺히기 시작한 것은 아닐지.
말이 더 슬픈 기록을 검게 물들이지만
시집의 2부로 접어들면 그의 어조는 다소 거칠어진다.
오늘처럼 신문지 쫙 펼치고 퍼져앉아
라면을 끓여 먹는 날은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는
젓갈김치가 드럽게 먹고 싶다
비린내 풀풀 날리는 새우젓 꼴뚜기 병신 머저리 새끼
우리나라 갯속에서 팍팍 삭은
―「우리 이야기」중에서
조간 신문을 넘기면서, 9시 뉴스를 보면서 이렇게 분노하는 이가 비단 시인 한 사람뿐이랴. 1부에서 보편적 인간 존재를 대변하던 시인의 목소리는 이제 한 시대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비판적 어조를 띠기 시작한다. 그의 비판의 칼날이 향하는 곳은 다양하다. 서민의 생활고는 외면하고 경제정책이란 미명으로 대기업에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정부(「일조」)이기도 하고, 사기와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 전반(「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www.넌누구냐.com」에서는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하여 폭력과 전쟁에 점점 무디어져가는 현대인을 그려내기도 하며, 「오래된 사랑노래」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태그를 사용하여 인터넷 사용이 가져온 소통의 단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인간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전지구적 관심도 나타나 있다. 이 모든 내용을 형상화하는 시어들은 정제되어 있지 않고, 세상에 떠도는 날것 그대로이다. 그렇기에 처음 시집을 넘겨본 이는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식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는 이라면, 거칠고 흉한 그 모습이 결코 무의미하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3부의 시들은 어떻게 읽으면 연애편지 같고, 또 어찌 보면 뮤즈 여신을 향한 시인의 외사랑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읽는 이의 마음결을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줄 이 서정시들은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어두었다가 그리움에 센티멘탈해지는 어느 밤 읽어보아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그리움도 상처도, 외로움마저도 “한 줌의 처연한 슬픔”(「포구에서」)으로 다가오는데, 그것을 끝내 맑은 울림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시인의 순수한 시심(詩心)일 것이다.
정한용은 깊은 수심 속에 살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 속에는 침엽수를 흔드는 새벽바람과 풀숲의 야생조들이 살아 있으며, 자주 불온한 아침과 쓸쓸한 축제가 태어나고, 시간이 나뭇잎처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덤가의 망초 명아주에서부터, 미시시피 강과 북해도의 노을과, 때로 봉두난발 암호 같은 바다를 향해, 명징한 촉수를 들이댄다. 그리하여 그는 섬과 섬 사이, 상처 맑은 집으로 일어선다. 생의 찬탄과 눈부신 덧없음으로 깊어지는 수심, 그 속에 첨벙 뛰어들어 더운 심장으로 매화를 피우는 시인을 만난다.
―문정희(시인)
시간의 지평 위에 자신을 위치시킨 뒤 안과 밖의 세계를 점묘시키고 있는 정한용의 시는, 세대론적 넉넉한 사유를 자신의 중심에 놓는 한편, 당대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에 예리한 감응력을 발휘한다. 심원으로부터의 부름에 응답하는 그의 언어가 세계의 근원을 곡절하게 짚어내는 방식은 아프고도 아릅답다. 쓰라린 상처를 삶의 예지로 순산시키고 있는 그의 시에서 우리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관찰과 풍자로 생명 있는 언어로 되살려놓는, 그의 광대한 숨결을 만난다.
―박주택(시인)
* 2006년 2월 20일 발행
* ISBN 89-546-0088-3 02810
* 121×186|136쪽|값 7,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김경미 (031-955-8865/ 8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