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심미적 경험의 세계!
전체 2부로 구성된 이 예술에세이는 ‘심미적 경험’을 키워드로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을 관통하며, 베르메르의 회화세계와 파윰의 초상화, 모네의 그림 1점, 외젠 앗제 등의 사진 11장을 인문학적 사유로 발효시켜 다채롭고 풍요로운 심미적 경험의 세계를 선사한다.
여기서 ‘심미적’이란 추악함까지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심미적 경험은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특히 예술작품을 접할 때 더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러한 경험은 작게는 작품의 감상과 분석에 머무르지만, 예술교육과 교양론으로까지 나아가고, 또한 인문주의와 문화론의 중대한 일부를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시민사회론이나 문화운동의 실천방식과도 연결된다. 결국 이 문제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1부, ‘심미적 경험의 의미’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심미적 경험이 삶을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인지, 또 자기 형성과 사회변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계기가 되는지 다각도로 살펴본다.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를 일상적 차원에서, 즉 ‘보기’와 ‘듣기’, ‘읽기’와 ‘쓰기’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모색해본 것이다.
‘보기’에서는 화가 세잔이 수십 수백 번도 넘게 그렸다는 ‘생트빅투아르 산’을 중심으로, ‘듣기’에서는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 연주와 첼리스트들의 첼로 연주로, ‘읽기’와 ‘쓰기’는 카뮈의 『이방인』을 중심으로 심미적 경험에 관한 다채로운 사유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이런 논의를 통해, 지은이는 심미적 경험의 의미는 대상 작품과 수용주체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또한 심미적 경험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를 거듭 살게 하는, 다른 풍요로움의 경험”임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2부, ‘심미적 경험의 파장’은 1부의 논의를 바탕으로, 심미적 경험이 실제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림과 시, 그리고 사진을 통해 살펴본다.
먼저 「고요의 직조」에서는 베르메르의 회화세계를 집중 조명하면서, 「레이스 짜는 여인」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에 깃든 고요의 의미를 세밀하게 읽어낸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일상적 소재를 포착한 베르메르의 실내화(室內畵)에서 인물들의 섬세하고 잔잔한 색채 너머에 깃든 고요의 내면을 포착한다. 그 결과, 「레이스를 짜는 여인」이 “몰두하고 일하는 자의 고요한 시선”으로 풍요롭다면, 「지리학자」는 “고요한 몰두가 지상의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한다”고 풀이한다. 이렇듯 지은이는 고요한 몰두의 한 순간을 체현한 그림에서, “오, 베르메르는 몰두하는 자의 아름다운 고요를 얼마나 섬세하게 빛과 색채로 번역해내고 있는가”라며, “고요 속에 드러나는 삶의 다른 차원”을 탐색한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이 글에 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기도 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인품과 기량, 예술표상의 관습 그리고 유형화된 사회적 문화적 힘들이 얼크러진 자리에서 생겨났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정한 개인적 또는 사회적 조건을 초월하여 여러 사람의 감성에 호소한다. 즉, 흔히 말하듯이 그것은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력은 자상하고 섬세한 예술작품 읽기를 통하여 피상적인 인상이나 사실적인 천착을 넘어 심화될 수 있다. 이러한 깊이 읽기를 통하여 비로소 예술작품은 밖에 존재하는 문화자산이 아니라 내면적 현재성을 얻게 된다. 문광훈 씨의 글은 얀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이러한 읽기를 시도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베르메르의 그림에 안으로부터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의 글은 베르메르의 그림과 그 비밀의 내면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그러한 예술을 가능하게 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문화적 공간을 규지할 수 있게 한다.”
「죽은 자의 초상」은 이집트 남부 파윰 지역에서 발굴된, 정형화된 미라의 초상화를 보면서 삶과 죽음에 관해 명상한 글이다. 일명 ‘파유의 초상화’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미라의 머리 위에 초상화를 덧씌운 것이다. 지은이는 특히 짧은 머리의 한 젊은이의 초상화에서, “죽음 뒤에도 살아 있는 듯한 생명의 시선”을 통해, 그 호소하는 듯한 “죽은 자의 말없는 눈빛에서 (……) 이미 떠나간 세계와 지금 남아 있는 세계, 그리고 앞으로 올 세계 사이의 쉼 없는 교감”에 귀기울인다. 그런 가운데 “죽은 자의 말없는 눈빛은 쉼없이 내 삶의 푸른 나무가 무어냐고 되묻는다”라며 골똘히 턱을 괸다.
「정거장에서의 중얼거림」은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을 모티브로 사색을 펼친 것이다. 이 그림은 모네가 생 라자르 역에서 증기기관차의 연기와 소리에 매료되어 그 풍경을 포착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라지는 것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성을 부여한 이 몽환적인 그림에서 지은이는 “색채와 형태의 모호성은 현실의 모호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며 빛과 색채의 어울림 속에서 재창조되는 사물과 세계의 초상을 본다. 그리고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와 부재하는 것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탐색한다.
일상에서 삶과 시와 생각의 의미론적 연관성을 궁구한 「숨은 조화」는 지은이가 우연히 찍은 봄버들 사진 1장을 보며 숨은 조화의 아름다움을 정밀하게 천착한 글이다. 예컨대 “버들가지는 일정한 대칭을 이루면서도 제각각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이렇게 뻗어가면서도 서로 어울린다. 어떤 질서 속에서도 이 질서가 자유를 허용하는 것, 여기에 자연의 숨은 조화가 있을 것이다. 조화는 창조되는 것 이상으로 발견되어야 하고, 이렇게 발견될 때 그것은 다시 재창조될 수 있다.” 자연의 다채로운 현상은 숨은 조화 위에 자리하며, 자연의 숨은 조화, 충일성의 질서는 좀더 깊고 넓게 체험되고 해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물의 주름」은 세계적인 사진가 유진 스미스, 앙드레 케르테스, 외젠 앗제, 도로시아 랭, 베르너 비숍, 도마쓰 쇼메이의 걸작 사진 11장을 꼼꼼히 읽으며, 삶을 뒤돌아보는 매개로서 사물들을 사유한다. 그것은 꿈과 상상력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 즉 사물의 배후, 그 주름과 굴곡의 표정을 헤아리는 진중한 작업이다.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예술 속을 헤맨다는 지은이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작품의 논리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고, 그것에서 점화된 삶의 문제를 깊이 천착한다(글마다 부단히 등장하는 단어가 ‘삶’이기도 하다). 심미적 경험, 즉 예술의 경험은 예술 자체가 그러하듯이 모든 개념과 논리에 저항하는 것인데, 그 경험의 다양성 속에서 삶의 문제를 반추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을 접하면서 “나와 타자, 감성과 철학, 육체와 이념, 인간과 자연이 서로 만나 충돌하며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예술작품에서 성장과 갱신을 위한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통해 각 작품의 의미 해독은 물론, 삶과 긴밀히 연계하여 심미적 경험을 밀도있게 조형하고 있다. 그래서 천천히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고급 예술에세이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또한 ‘삶의 엑기스’를 담은 예술작품들도 그 내면이 만만찮은 에너지의 저장고임을 투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