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보다 아름다운 조연, 그림보다 재미있는 액자 이야기!
“액자가 명화에 대한 당신의 기억을 바꿉니다!”
우리가 몰랐던, 액자에 관한 몇 가지 진실
액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생겨났을까? 사실 ‘액자’의 또다른 이름인 ‘틀’ 또는 ‘테두리’의 사용은 인류에게 아주 오랜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형태와 배경을 나누어 그림을 그린 선사시대의 도자기, 또는 동굴이나 원시 막사 같은 선사시대의 건축물을 보면 인류가 생각보다 일찍 이 ‘틀’의 효용가치를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틀의 효용성은 물론 시각적인 안정감, 즉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동굴에 살던 사람들이 동굴 입구로 바깥 풍경을 내다볼 때 ‘틀’을 통해 안정감을 느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동굴 입구에 둘러싸인 풍경 한 조각을 바라보며 맛본 시각적 만족감이 결국 풍경(형태 또는 그림)은 테두리(배경 또는 액자)에 둘러싸여 있을 때 보기에 가장 편안하다는, 따라서 그림은 액자에 넣어야 한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건물을 지었다. 건물을 짓고 보니 그것을 좀더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욕구를 품게 되었고, 머지않아 그들은 건물 외벽과 내부에 벽화를 그리고 조각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때 벽에 그린 그림과 조각을 돋보이게 하면서, 건물 전체의 분위기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벽화 둘레에 일정한 간격의 테두리(액자)를 두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벽화 전통은 화가들이 분리된 화면(합판이나 캔버스)을 찾으면서 차츰 쇠퇴하게 되었고, 벽화에 테두리를 두르던 전통만 유지되어 오늘날 액자 사용의 또다른 시초가 된 것이다. ‘액자’라고 하면 우리는 ‘직사각형 틀’을 연상하게 마련인데,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면 납득이 좀더 쉬워진다. (국가와 문화를 막론하고) 건물은 네모반듯한 직사각형으로 지어졌고, 벽화를 감쌀 테두리 역시 건물 모양에 맞춰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 액자의 ‘재’탄생
이렇게 액자는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거나 “형태(그림과 조각)를 돋보이게 한다”는 매우 실용적인 목적 아래 탄생했고, “절대불변의 법칙”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 존재는 그림에 있어 “절대”적이며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림이 아닌 액자를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 앞에 삼삼오오 모여, 그림이 아니라 액자에 대해 토론하는 광경을 상상해보자. 분명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왜 그럴까. 무의식중에 우리는 액자를 단순한 ‘장식’ 요소로, 그림에 비해 부수적인 존재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다수의 편견과는 달리, 액자는 선사시대 이래 단 한 번도 그림과 다른 몸이었던 적이 없었다. 액자는 그 누구도 아닌,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서 생명을 부여받아 그림과 운명을 같이해온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오늘, 이 책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는 그동안 그늘에 가려 마땅한 조명을 받지 못한 액자의 가치를 되살리고, 그림과 동고동락한 액자의 운명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이른바, 액자의 ‘재’탄생을 고하는 신호탄 역할을 자청한 것이다.
이러한 임무 수행의 일환으로, 이 책은 액자에 대한 우리의 다양한 편견을 불식시킨다. 모든 액자의 모양은 네모반듯한 직사각형이며, 액자의 유일한 역할은 그림을 장식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그 첫 번째. 리버스의 방풍창 액자(82쪽 사진), 달리의 사람 모양 액자(108쪽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액자는 각 그림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형태와 디자인을 달리했다. 기능과 역할도 마찬가지. 볼록렌즈가 햇살을 모으듯, 시선을 그림에 집중시키는 본연의 액자뿐 아니라, 단순한 틀의 기능을 넘어서 작품의 일부가 된 액자, 화가들이 직접 모은 물건으로 만든 ‘재활용’ 액자, 그리고 유명 화가들이 손수 만든 ‘명품’ 액자까지, 이 책이 보여주는 액자의 다양성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또한 이 책은 액자가 화가에게 물감, 붓, 캔버스 외에 제4의 도구였으며, 관람자에게 그림의 핵심이나 화가의 생각을 파악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음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독자는 액자를 통해 이제껏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그림에 관한 중요한 사실들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림만으로는 쉽게 알 수 없는 제작 당시의 시대 배경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범한 신고전주의식 액자에 여러 가지 상징적인 장식을 첨가한 뒤플레시스의 액자(60쪽 사진)를 보면 이 초상화가 미국인의 애국심을 부추기기 위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르네상스기 북유럽 초상화 액자의 전형을 그대로 모방한 셔먼의 액자는 과거와 현재의 초상화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초상화의 가치와 의미 자체를 재고하게 만든다. 또한 꽃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볼의 액자(50쪽 사진)에서는 당시 식물학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관심과 유행을, 액자 자체를 부정한 마티스(105쪽 사진)나 몬드리안(107쪽 사진), 스텔라(126쪽 사진), 겔프먼(129쪽 사진)의 작품에서는 액자와 그림의 관계에 대한 화가들의 인식 전환과 함께 현대미술의 태동을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은 액자의 선택과 제작에 앞서 화가들이 얼마나 많은 실험과 연구를 감행해왔는지 세세하게 들려준다. 특히 반 고흐의 경우, 그가 직접 만든 액자는 현재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동생 테오에게 보낸 스케치(119쪽 사진)를 통해 우리는 화가가 살아생전 액자 디자인에 대해 얼마나 고심했으며, 어느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액자를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클림트 형제나 프렌더가스트 형제의 사례(100쪽 사진)는 화가와 디자이너의 협업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장식물’로 치부하는 액자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작품 요소였음을 깨닫게 한다.
세 가지 다른 액자를 끼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
그림은 액자 하기 나름이다?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값진 경험은 역시, 같은 그림도 액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깨달음과 이를 통한 그림의 ‘재발견’일 것이다. 액자의 다양한 형태와 기능, 제작 배경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이 책은 이미 충분히 흥미롭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액자 이야기가 독자로 하여금 전혀 다른 시각에서 그림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휘슬러는 그림과 액자에 나비 한 마리씩을 나란히 그려넣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넘어 사실은 휘슬러의 그림(53쪽 사진)이 얕은 깊이감을 강조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평범한 바다 풍경으로만 보이는 오할로란의 작품(77쪽 사진)은 물고기 비늘 액자와 그 아래 매달린 물고기 사체 조각 덕분에 ‘쓰나미’라는 대재난을 예고하는 무시무시한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그림을 돋보이게 하거나, 화가의 생각을 더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액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폰 스투크의 「죄악」(27쪽 사진)이 그 한 예인데, 이 작품은 본래는 강한 성욕과 불온한 악의 기운을 발산하는 그림이지만, 화가는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 액자를 끼움으로써 관람자의 성적 충동과 쾌감을 극대화했다. 그림과 액자의 극렬한 대비 속에서 우리는 그림만으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없는 화가의 의도를 좀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액자 만드는 남자의 특별한 그림 읽기
이 책을 쓴 W. H. 베일리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세잔, 피카소, 반 고흐의 작품에 끼울 액자를 새로 디자인했고, 미술품 수집가들과 박물관 등에 액자 디자인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액자 전문가이다. 서문을 쓴 애덤 곱닉이 “때로는 두세 단락까지 이어지는 면밀한 그림 읽기는 부끄럽게도, 우리가 그림을 얼마나 얄팍하게, 그리고 대충 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라고 한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베일리의 그림 읽기는 특별하다. “혹여 숨어 있을지도 모를 수수께끼를 찾으려 들기보다, (액자를 통해)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화가에 대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일” 줄 아는 그는 그저 미술사에 밝은, 입담 좋은 이야기꾼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액자가 “그림의 핵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베일리는 대부분의 미술 이론가들처럼 그림 속 등장요소, 또는 화가의 활동 배경과 같은 사실 정보에 의존하는 대신, 액자와 그림 사이의 소통을 읽어내 독자가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한다. 그 옛날 화가가 그랬듯이, 특정 그림에 끼울 액자를 직접 만들어본 베일리는 그림 속 형상들이 만드는 리듬과 질서를 거의 본능적으로 헤아릴 줄 알며, ‘해설자’의 눈이 아닌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읽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베일리의 이러한 특별한 ‘눈’을 통해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의 심리를 가슴으로 이해하고, 그림 속에 흐르는 주제와 사상을 그 어떤 여과도 없이 읽고, 느낄 수 있다.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속, 액자의 다양한 세계
【제1장_제단장식물을 모방한 액자】
중세시대부터 많은 화가들은 서양식 액자의 출현을 예고한 제단장식물을 주목해왔다. 제단장식물에 사용된 틀은 기독교 교회 건축이 발전하기 훨씬 전에 성상화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종교화를 넣어두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전통에서 유래한 ‘감실형’ 액자는 고대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엔태블러처, 프레델라, 안테펜디움과 같은 건축 요소로 이뤄져 있으며, 화가들이 액자의 종교성에 집착하지 않고, 잠재한 가치들을 개발하면서 매우 익숙한 비품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감실형 액자를 개인 소장처나 미술관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이 액자는 종교화뿐 아니라 초상화, 그리고 종교와 무관한 그림에도 두루 사용돼 작품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제2장_화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 액자】
액자는 언제나 화가의 마음과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창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거대한 설치작품, 대형 조각과 그림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작품 속으로 빨아들여 관람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화가의 시선을 수용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은 그림의 경우, 우리가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그림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하는 매개체, 즉 출입구가 필요하다. 그런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액자다. 이 장에서 지은이는 액자와 그림 전반에 빨강 점을 찍어 그림의 소재, 즉 무지개의 신비감을 강조한 호드킨의 작품과 마치 쇼윈도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액자 속에 물건을 채워 넣어 시선을 집중한 블레이크의 작품 등을 다룬다.
【제3장_장인기술의 산물, 그림을 장식한 액자】
액자는 장식예술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로, 정교한 디자인과 재료, 장인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의자나 조명 기구와 달리, 액자는 언제나 그만의 특별한 역할을 가져왔다. 그 역할은 바로 그림을 주변 환경에 묻히지 않게 하는 동시에 적절히 융화할 수 있게 하는 것, 관람자에게 그림 소유자의 부와 취향, 권력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별무늬와 가면, 다섯 개의 원형 양각 장식으로 단순한 원형 액자에 역동성을 부여한 미켈란젤로의 액자, 에스파냐의 그로테스크 문양으로 초상의 위엄을 더한 벨라스케스의 장식 액자 등을 만날 수 있다.
【제4장_그림의 내용을 완성한 액자】
액자는 그림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주제가 잘 전달되도록 그림의 내용을 보충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화가나 그림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관람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심지어 특정한 정치 이념을 주입하는 것 또한 액자의 역할이다. 이 장에서 설명할 에이킨스, 스테트하이머, 셔먼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풍경화의 액자는 배경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나이아가라 폭포를 그린 힉스와 호킨스의 그림), 때론 작업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클레의 작품). 피핀과 오할로란의 예처럼 상징물이 풍부한 액자는 관람자의 감정을 북돋고, 스미스의 작품과 소방관의 트로피 액자처럼 사실적인 형상이 두드러진 것들은 그림 속 사건을 요약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제5장_화가가 발견한 액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신선한 재료를 찾아 작품에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창작 발전을 도모하는 일도 화가들의 임무에 포함된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예술 관습을 거부한 다다이즘에서 영향을 받은 일부 화가들에게는 쓰레기더미조차 영감을 위한 좋은 재료가 되었다. 미로, 리버스, 칼로가 초상화에 사용한 액자는 신선하고 놀랍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경직된 얼굴을 완화하고, 주의를 끄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이 장에 소개한 요쿠, 손더스, 사아의 액자는 화가가 직접 찾아 모은 물건들이 장식 문양으로 활용됐거나, 그림 내용의 일부로 사용된 경우를 보여준다.
【제6장_화가가 디자인한 액자】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끼울 액자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르네상스시대는 화가와 공예가가 다양한 통로를 통해 함께 작업하며 액자의 기능, 구성, 장식에서 수만 가지 공적을 이룬, 전에 없이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제3장에서 소개한 미켈란젤로와 바릴레의 합작품은 화가와 공예가의 협업이 만든 훌륭한 예로, 이러한 전통은 구스타프와 게오르그 클림트, 찰스와 모리스 프렌더가스트, 투롭과 유스텐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제7장_화가가 직접 만든 액자】
화가가 직접 액자를 만들 경우, 거의 완벽하게 액자와 그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필드와 하넷이 실제 액자를 사용하는 대신 캔버스 위에 직접 액자를 그렸던 것처럼, 화가들은 때로 필요에 의해 액자를 직접 제작하곤 했다. 화가가 만든 액자도 작품의 형태 구성과 내용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또다른 요소들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호드킨과 존스, 달리의 작품이 이를 입증해주며, 이 장에서 다룬 너트의 작품처럼 액자를 없애면 그림의 주제의식이 흔들리고, 통일성이 깨지며, 의미가 축소되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