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강 둑에서 오자면 게네고 가(街)의 끝에 이르러 퐁네프 파사주에 닿게 된다. 마자린 가에서 센 가로 통하는 이 좁고 침침한 회랑은 길이가 삼십 야드, 폭이 이 야드에 불과하다. 바닥을 덮고 있는 갈라진 노란색의 포석들은 언제나 심한 습기를 내뿜고 있다. 통로를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유리 천장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다……회랑 왼편에는 침침하고 낮고 다 쪼그라진 가게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새어 나오는 그곳에는 헌책방, 장난감 가게, 지물상들이 있다……흉하게 갈색칠 된 장롱 선반 위에는 무언지 모를 상품들이 이십 년 동안 잊혀진 채 널려 있다.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중에서19세기 파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도시로, ‘세기의 수도’라 일컬어졌다. 벤야민이 논문의 주요 대상으로 잡았던 제2제정기의 파리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장관 오스만의 확장과 팽창을 원칙으로 한 일종의 과대망상적인 도시 행정이 이루어진 시기로, 최초의 만국박람회, 아케이드, 백화점 등 자본주의적 공간이 생겨났으며, 유명한 오스만 대로(大路) 건설도 이때 이루어졌다. 아케이드를 어슬렁거리는 만보객, 창녀, 새로운 볼거리인 파노라마, 가스등, 지하철, 도로 표지판, 철제 건물, 유겐트 양식, 사진, 권태, 도박, 매춘, 유행, 광고, 마르크스와 캐리커처 화가 그랑빌, 프루스트, 보들레르 등 이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풍속, 풍경, 인물, 사상, 문화에 대한 미시 관찰과 분석의 집대성이 바로 「파사젠베르크」이다. 벤야민의 회상에 따르면 「파사젠베르크」의 영감은 파리 파사주를 무대로 한 루이 아라공의 초현실주의 소설 『파리의 농부』를 읽던 중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파리에 머물며 프란츠 헤셀과 함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번역하던 벤야민은 프로젝트를 구상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 현상에 매료된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랬듯, 이제는 퇴물이 되고 낡아버린, 한 도시의 최초 자본주의적 풍경 속에서 19세기 사람들의 집단무의식과 소망, 신화와 알레고리,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를 읽어냈다. 역사 저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인용으로 구성된 몽타주로서의 철학
최근에 영국식 이름을 가진 새로운 호텔들 사이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최신식 파리 파사주인 아케이드가 개장했다. 개장식에서는 제복을 입은 끔찍한 관현악단이 화단과 분수 틈에서 연주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면서 사암으로 된 문턱을 넘거나 거울 달린 벽면을 지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료의 품질을 보증하는 방편으로 최신 자동차의 구리 내장 위로 떨어지는 인공우(人工雨)를 보았고, 연료로 돌아가는 전동 장치를 보았으며, 검은 플래카드에 대형 활자로 씌어진 피혁 제품이나 축음기 레코드, 수놓인 기모노의 가격을 읽었다. 위에서 비추는 산광(散光)을 받으며 사람들은 타일 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여기서 최신 유행의 파리를 위한 새로운 파사주 길이 준비되고 있을 때,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아케이드 중 하나인 오페라 파사주는 사라지고 있었다. 파사주를 가로지른 오스만 산책로가 파사주를 삼켜버린 것이다. ―발터 벤야민, 「파사젠베르크」중에서한편으로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의 상반되는 두 저서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17세기 독일 바로크 비극을 분석한 극히 추상적인 논문『독일 비극의 기원』과 아방가르드적이며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한 에세이집 『일방통행로』를 완성하면서 벤야민은 양가적 입장에 선다. 두 저서의 주제가 서로 상충하는 듯 보였던 것이다. 영원한 이념인 형이상학을 재현한 전자와 시간의 불가역성 및 그에 따른 부패의 결과를 논한 후자 사이에서 그는 형이상학적 탐구와 역사적 탐구의 방법론적 관계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역사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구체적일 수 있는가’를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파사젠베르크」가 역사 서술의 실천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역사는 현실을 기만적으로 변형하는 자체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역사 속에 남은 문화적 내용물(즉, 아케이드가 상징하는 것)은 ‘현재’라는 개념의 무매개성을 파괴하고, ‘현재’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비판적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 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야민은 특유의 미시 관찰법을 개발한다. 그는 남겨진 사료들을 통해 19세기 사회문화 유형의 일반적 성격을 추정하고, 더 나아가 마르크스가 정의한 물신성에 대한 독창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사젠베르크」는 극도의 구체적인 사료에 의지한 유물론적 역사철학인 동시에, 생산 영역에만 집중했던 마르크스가 추방해버린 사물과 인간의 관계 사이의 마술적 환각을 되살린 비판적 마르크스 분석이다. 또한 벤야민은 파편화된 문화적 내용물들이 서로 충돌하며 빚어내는 몽타주 효과에 대해 주목했다. 그는 맥락을 교란하여 미망(未忘)을 차단하는 진보적 형식인 몽타주를 「파사젠베르크」의 지배적 구성원리로 삼았다. 인용의 기술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파사젠베르크」의 형식이었다. 벤야민이 수집하고 분석했던 이미지 자료는 조화를 이루기 위해 배치되거나 조절되지 않았으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모 묶음과 개요로만 남은 전설의 저작 책의 형식으로 묶여 나온「파사젠베르크」는 1989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완간한 총 일곱 권짜리 벤야민 『전집』 중 미완성 유고를 묶은 5, 6권 가운데 제5권이다. 즉, 이것은 벤야민이 엮고 집필한 것이 아니라, 벤야민이 남긴 메모 묶음과 개요를 모은 것이다. 이 『전집』 제5권은 출간되자마자 편집 원칙을 두고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프란츠 헤셀과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는 1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알파벳으로 분류한 22개 대(大)항목의 어마어마한 메모와 논평 묶음, 사회연구소에 제출한 「1935년 개요」, 그리고 두 가지의 보들레르의 연구서로 남았다. 저자인 수잔 벅 모스는 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 연구를 관통하는 세 가지의 개념(신화, 자연, 역사)을 네 가지로 편성하여 설명한다. ‘자연적 역사’는 19세기 원역사로서의 아케이드의 개념과 벤야민이 공산품의 세계를 역사의 흔적인 화석으로 바라보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신화적 역사’는 진보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적 시각을 다룬다. 진보의 환등상이 19세기에 뿌리내린 양상을 벤야민이 추적한 방식 및 이 환등상에 대한 저항담론을 구성했던 방식이 소개된다. ‘신화적 자연’은 19세기 집단무의식에 깃든 소망 이미지에 대한 벤야민의 정의를 통해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테크놀로지의 잠재력 사이에서 논의된 변증법적 사유를 밝힌다. ‘역사적 자연’에서는 보들레르의 시에 표현된 근대적 알레고리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에 초점을 맞춰, 폐허의 이미지로 포착된 상품사회의 본질을 들려준다. ‘이것이 철학인가?’는 게르숌 숄렘에게 영향 받은 유대인 특유의 형이상학적 신학의 요소가 「파사젠베르크」에 미친 영향을 열거하였으며, ‘대중문화라는 꿈나라’에서는 다시 초현실주의 테마로 돌아가, 대중문화와 유년기에 깃든 무의식의 영향력을 분석했다. ‘유물론 교수법’은 파시즘이 휩쓴 집필 당시의 유럽의 ‘현재’를 조망하고, ‘후기: 혁명적 유산’에서는 벤야민의 망명 시도와 실패를 전기적 자료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목숨을 담보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키려 한 학자 벤야민의 마지막 모습을 감동 깊게 되살려낸다. ‘남아 있는 이미지’는 벤야민이 모은 사료와 벅 모스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파사젠베르크」의 구성원리인 몽타주와 변증법적 이미지에 충실하게 재현한 일종의 ‘샘플’이다. 1948년에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자료를 검토한 아도르노가 말했듯, 「파사젠베르크」의 재구성은 만약 그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이라면, 오직 벤야민만이 할 수 있었을 일’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가 수잔 벅 모스는 벤야민이 남긴 단편적 자료 저변에 일관적이고 지속적인 철학적 구도가 존재함을 독자에게 성실하게 알리려 한다. 벤야민이 남긴 글을 외삽하여 그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조명하려 한 이 시도는 「파사젠베르크」의 존재만 알고 있었을 뿐, 그 방대한 세계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국내 독자들에게 적잖은 파장을 던지게 될 것이다. 놀라운 상상력.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 탐구자인 벅 모스는 직관과 환영을 통해 신비를 벗겨낸다. ―유진 웨버, 『더 뉴 리퍼블릭』
영원한 것은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에 달린 한 조각의 레이스이다.
-발터 벤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