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사이코 테라피스트의 심리여행>는 워싱턴에서 활동중인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십수명의 인물에 대한 심리치료의 전 과정이 솜씨 좋게 요약되어 있다.
저자 권문수 씨는 워싱턴에서 10년 넘게 사이코 테라피스트로 활동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상담해온 한국 사람이다. 우리와는 달리 정신과 의사에게 달려가기 전에 먼저 사이코 테라피스트를 찾는 게 하나의 당연한 절차처럼 돼 있는 미국에서는 이들의 존재감은 정신과 의사를 능가할 정도다. 저자 권문수가 상대하는 환자들은 결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그는 온갖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진심으로 공감하고, 반드시 회복될 수 있는 치료의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여기서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치료의 방법이 교과서적이지 않고 개성적이며 때로는 임기응변적이기도 하지만, 확실한 효과를 낸다.
첫 번째 사례로 등장하는 제시카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원래 다른 테라피스트 담당환자였는데 병원에서 골칫거리로 명성이 높았다. 상담을 받는 중에도 2주에 한번 자살을 시도해서 테라피스트의 혼을 빼놓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느날 권문수에게로 넘어왔다. 문제는 그녀가 남성기피증이 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자는 남자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만난 제시카는 그 앞에서 몸을 벌벌 떨 정도로 불안해했고, 얼마 후 아무 말도 없이 뉴욕으로 가버린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저자는 책망하는 대신 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뉴욕에서의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그것도 매우 황당한. 그러자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화는 어렵게 물꼬를 텄다.
제시카는 결혼하기 전 남성편력이 심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불행은 여성편력이 심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불거졌다. 제시카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이혼했고 그녀는 남성기피증과 함께 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정신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병원비가 몽땅 빚으로 쌓여나갔고 악순환이 반복됐다. 권문수는 큰 도화지 하나를 내밀면서 제시카에게 가지고 있는 빚을 모두 거기 적어보라고 했다. 제시카는 피식 웃으며 무슨 짓이냐고 반문했지만 일단 기억을 떠올려 적어보았다. 액수는 상당했다. 권문수는 생각했다. 경제적인 문제가 그녀에게는 가장 크고 우선적인 과제라고. 그는 그녀가 직접 병원에 편지를 쓰게 했다. 빚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 치료가 안 되니 조금이라도 탕감해달라고 말이다. 그녀가 편지를 쓰는 동안에, 권문수는 해당 병원이 어떤 제도를 갖고 있는지 등을 알아보았고 편지내용을 감독했다. 그런데 감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었다.
며칠 후 훌륭한 내용의 6통의 편지가 만들어졌다. 권문수는 직접 병원에 편지를 발송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그리고 한두 주일 후 기적이 일어났다. 모든 병원에서 돈을 받지 않겠다는 답장이 온 것이다. 한 병원에서는 익살맞게 “치료비를 제시카에게 기증하는 바이니 빨리 회복되길 바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너무나 놀란 제시카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권문수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빚을, 집에서 전화를 돌려 해결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그렇게 제시카는 상태가 호전됐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상태가 호전되자 제시카의 남성편력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남자를 만나고 다니더니 얼마 후 권문수는 제시카에게 프러포즈를 받게 된다. 어쩐지 일이 너무 순조롭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유드린다.
이 책은 제시카를 포함해 그들만의 독특한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슬픔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에릭, 감당할 수 없는 불운이 20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난 안젤라, 5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제임스, 첫사랑 때문에 괴로워서 술을 마시지만 마실수록 정신이 또렷해져서 너무나 괴로운 스티브, 마흔의 나이에 아버지가 각각 다른 아이 10명을 낳은 노숙자 마가렛, 세상 모든 걸 사랑하는 교감의 1인자이지만 어느 날 텔레비전 주인공들이 말을 걸어오면서 증상이 시작된 폴 아저씨,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저스틴과 피터, ADHD에 걸린 산만한 아이들, 라파엘과 새미어가 차례로 등장한다.
폴아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권문수는 그 특유의 친화력과 진정성을 발휘해서 이야기를 진전시켜 나간다. 그 과정에서 결국 마음이 통하게 된다. 제임스는 집착하는 숫자를 5에서 3으로 한단계 낮췄으며, 안젤라는 정말 자신을 아껴주는 3번째 남편을 만났고, 스티브는 첫사랑과 다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다. 이렇게 삶이 점진적으로 회복되어가는 장면들은 비온 다음날처럼 개운하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안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권문수 스스로 고민하고 털어놓는 고백의 내용들은 독서의 가장 큰 묘미이자 감동점이라 할 수 있다.
2부에서는 링컨과 같은 위대한 역사인물의 우울증, 저자가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테라피스트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글, 외로움과 지루함이라는 문제에 대한 독립적인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다. 2부 또한 권문수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풍부하게 등장하면서 1부 못지않은 재미와 공감을 이루어낸다.
이 책의 독특한 점 몇 가지 요약
- 사이코 테라피스트라는 직업세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
- 미국인의 삶을 규정짓는 몇 가지 사회제도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
- 한국인의 정서와 시각으로 미국인과 소통한다는 점(외로움은 보편적인 것!)
- 극단적인 정신질환과 일반적인 심리문제를 동시에 다룸으로써 이 두가지가 범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임을 인식시킴
- 소설처럼 재미있고 에세이처럼 친밀한, 그들의 이야기
-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아포리즘이 아니라, 매우 지난한 소통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아포리즘이 책 중간 중간 심심치 않게 나옴
- 인간의 심리문제,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알게 모르게 알게 된다.
- 버지니아텍 총기사건의 조승희에 대한 테라피스트로서의 애도와 뒤늦은 분석.(조승희의 집은 저자의 개인오피스와 매우 가깝다. 그는 오피스에 걸려왔다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끊고는 했던 그 전화가 바로 조승희의 것이 아니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미안해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저자 권문수 씨는 우연히 알게된 노매드라는 여행문화웹진에 글을 기고했다. 그 사이트에 이런저런 연재글이 올라오는 걸 보고 글을 한편 써서 보낸 것이다. 그 글이 너무 반응이 좋아 1년간 이 책에 들어간 내용을 연재하게 됐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노매드 사이트 안에 <유목민의 마음 여행>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개별적인 상담도 하고,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끼리의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여행문화웹진 <노매드>에 연재될 당시 독자반응
-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사라진다.”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billy
- 왜 이럴까요. 읽을수록 자꾸 빠져들어요. 코린
- 단편소설처럼 재미있으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네요. 새벽비
- 매일 매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글 너무 잘 봤습니다. 레니 크레비츠
- 코가 시큰하네요. 오늘 좋은 꿈을 꿀 것 같습니다. 이광열
- 눈시울이 뜨거워져오네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푸라면
- 최고입니다. 최고!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