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에서 되살아나는 교과서의 위인들
1530년경, 카르티에 라탱은 신-구교 사이의 갈등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지도자 장 칼뱅을 비롯, 예수회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등 훗날 역사에 이름을 떨치게 될 위인들이 실제로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카르티에 라탱』에서 이들은 주인공 드니 쿠르팡과 마지스테르 미셸을 돕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해 친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음울하고 깐깐한 칼뱅, 단순 무식 과격한 대머리 아저씨 로욜라, 선량한 인상의 모범생 사비에르 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을 소설 속에서 살아 있는 인물로 접하는 것은 역사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다. 또, 이야기 곳곳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등도 카메오로 슬쩍 등장한다.
역사학자와 소설가의 길 사이에서
작가 사토 겐이치는 일본 작가로는 특이하게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이다. 도호쿠 대학 대학원에서 서양 중세사를 전공하던 중 워드프로세서 연습 삼아 석사논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대사를 붙여본 것이 소설 스바루 신인상 최종심까지 오른 것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역사학자와 역사소설가의 길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하다 결국 소설가의 길을 택한다. 그 이유에 대한 작가의 답은 이렇다.
"조금 억지스런 비유지만, 역사학자의 작업이 역사적 사실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이라면, 역사소설가는 역사적 사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붙잡을 수 있다는 거지요."
역사학을 전공한 만큼 그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풍속에 대한 완벽한 고증을 바탕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그러나 가능할 법한 틈새의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끌어올린다. 『카르티에 라탱』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 씌어진 소설이다.
"파리에 가서 카르티에 라탱을 찬찬히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아주 좁은 곳이더라구요. 교과서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전혀 다른 흐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칼뱅이 있던 곳 맞은편에 사비에르가 살고 있었으니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교과서는 결과밖에 나와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던 것이지요."
"신학이 가치관을 규정하고 파리 대학이 지성의 중심이던 시기였습니다. 칼뱅도 사비에르도 당시의 카르티에 라탱에서는 이단이었습니다.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통 속의 엘리트가 아니라 그곳에서 뛰쳐나올 에너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16세기 파리의 연쇄살인에 신학논쟁을 결합시킨 지적 미스터리
잘 짜여진 인물 배치와 대화를 통해 기독교가 흔들리고 있던 복잡한 시대 상황과 함께 종교와 인간에 내포된 모순을 명쾌하게 묘파한 작가의 수완이 대단하다. 단숨에 흥미를 더해가는 이야기 또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서양 역사와 문화에 빠져들어 약동하는 인간 드라마를 맘껏 즐길 수 있게 한다. 사토 겐이치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소설이다. 마이니치 신문
16세기 파리의 연쇄살인에 신학논쟁을 결합시킨 지적 미스터리이자 서양 야담의 재미가 가득 담긴 소설. 작가 사토 겐이치는 중세 프랑스의 숨결을 그대로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아사히 신문
카르티에 라탱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에서 시작해 당시의 급박했던 종교세계를 둘러싼 어둠을 파헤쳐가는 전개가 굉장히 스릴 있다. 유명한 인물들을 생생한 구어체로 되살려내는 솜씨도 뛰어나다. 산케이 신문
사토 겐이치(佐藤賢一)
1968년 야마가타 현 쓰루오카 시에서 태어나 도호쿠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프랑스사를 전공하며 유럽 근세의 절대주의를 연구했다.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재미 삼아 만들어본 소설이 소설 스바루 신인상 최종심에 오른 것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93년 『재규어가 된 남자』로 제6회 소설 스바루 신인상을 받았다. 1999년 『왕비의 이혼』으로 나오키 상을 받으면서 서양 역사소설 작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용병 피에르』 『붉은 눈』 『쌍두의 매』 『카이사르를 쳐라』 『2인의 검객』 『옥시타니아』 『검은 악마』 등의 작품이 있다.
옮긴이 김미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교육학연구과 석사과정을 거쳐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다수의 일본어 논문이 있으며, 『은빛 비』 『번쩍번쩍 의리통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04년 5월 29일 발행
* ISBN 89-8281-792-1 03830
* 신국판 / 440쪽 / 9,800원
* 담당편집 : 이상술(031-955-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