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어우러진 그리움과 향수의 공간을 노래하다
친숙한 어법과 쉬운 구문으로 서정의 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는 시인. 그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지금 이곳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고향, 추억과 향수의 공간에 가 닿고 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오늘 우리의 현실은 "첨단과학시대"(「바보 같은 시인에게」) "디지털 고감도 시대"(「옛 동산에 오르니2」), 그러나 삭막하고 황량하며,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세계, 오염되고 훼손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타고 온 차바퀴에 밟혀서/노루 귀가 잘려나간 것을 보았다/우울한 발걸음 옮기는데/차바퀴 강물에 씻으며/귀 잘린 노루귀꽃을/강물에 띄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새들이 흰 똥 누던 동구 밖 회나무/포클레인에게 뽑히는 것을 보았다
―「노루귀꽃」 중에서
자동차 종합시장 부근/대단지 아파트 들어서면서/(……)보리밭 둑길 걷는/재미도 사라졌다//(……)//눈은 또 종이컵이나 라면봉지, 휴지와 널린 꽁초, 기름때가 묻은 쥐똥나무, 흙바람 일으키며 질주하는 덤프트럭의 요란한 클랙슨을 잠재워주기도 하고……//눈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 브래지어, 빛바랜 생리대,/노란 민들레 속잎까지 적셔주기도 하지만……/슬픈 세월을 돌아누운 설움까지/하얀 눈이 덮어주고 있다
―「눈 오는 월성동」 중에서
"문명의 달이 마을 사람들을 떠나게 하고"(「서설(瑞雪) 내리던 무학산」), "보리밭 둑길 걷는 재미도 차츰 사라진 시절"(「눈 오는 월성동」), 물질적 풍요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첨단문명 속에 살면서도 시인은 여전히 따스하고 사람다웠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사는 것 나아졌다지만/국민소득 높아졌다지만" 시인은 "감나무에 비친 달 여위어"가고, "좋은 땅 일구는 터전 간 곳 없고/(……)맑은 강 모래무지 추억이 사라"(「그리운 남풍1」)지는 현실이 아프기만 하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의 삶을 또다른 꿈의 공간, 따뜻한 남풍이 불어오는 그리움과 정겨움, 애틋함의 공간으로 이끌어간다.
그리운 남풍이여/(……)허기져 노오란 무순 잘라 먹고/허기져 진달래꽃 따먹고/허기져 알싸한 찔레순 꺾어 먹고/허기져 서러운 섣달 이겨내고 나면/언 몸 녹여주고/해산한 아내 몸 풀어주던/골병든 한 사나이의 뼛속까지 녹여주던/그리운 남풍이여/그리운 남풍이여 ―「그리운 남풍1」 중에서이처럼 자연과 어우러진 추억과 향수의 공간에 촉촉하게 배어 있는 그리움 때문에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잊고 있던 지난날로 되돌아와 있는 듯한 느낌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움과 향수의 공간에는 어김없이 어머니가 서 있다. 저녁놀이 가만히 내려앉고 어느 집에선 밥 짓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또 어디선가 밥때를 잊고 노는 어린 자식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이 따스한 정경을 시인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낸다.
잔치가 끝나도 큰방에 둘러앉아 밤늦도록 놀았다. 잠잘 데가 모자라 마루에서 베개 없이 서로 머리 거꾸로 박고 자면서도 소고기국에 이밥 말아 먹는 게 좋았다(……) ―「그리운 남풍2」 중에서
어둠살이 끼고 저녁 답이면, (……) 영태를 부르는 어메의 긴 목청이 아직도 저녁 아이 부르는 상(床)머리에 남아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아득히 들려오고 있다.
―「저녁 답2」 중에서
대낮에 뻐꾸기 울면, "아이고, 고놈 참 팍팍하게도 운다"고 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먼젓번에 살았던 집을 찾아가보았다 버들꽃 날리는 대낮 그늘에 어머니의 수척한 모습이 남아 있었고, 당신이 심은 하얀 접시꽃이 마당에 자라고 있었다
―「대낮」 중에서
이처럼 "향수와 자연 회귀의 미학"을 체현한 도광의 시인의 시 편편은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 멋도 기교도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쉽게 써내려간 시 행간에 예민한 감수성, 까다로운 언어감각을 감추어놓았다. 무엇보다, 무르익은 서정세계에 녹아든, 삶과 인간을 보는 애정 어린 시선은 모든 기교를 앞지르며 읽는 이에게 긴 여운을 준다. 『그리운 남풍』은 "외딴섬 같은 곳에서 아직도 시로 빚은 술을 하염없이 들이켜고 있"(「바보 같은 시인에게」)을 것만 같은, 천상 서정시인의 시집이다.
무기교의 기교, 은은하고 편안한 서정시의 경지
서정성이 한국시의 기본이라 해도 도광의 시인의 서정은 독특하면서도 편안하다. 서정을 관통하는 그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광의 시인의 시는 늦은 가을 감나무에 높게 매달려 시리고 푸른 하늘에 대비되어 붉게 반짝이는 홍시처럼 외롭게 보이지만 아름답다. 스스로 외롭기에 오히려 그의 시가 사람의 훈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
도광의 시인의 시는 인문적 시학과 서정적 시학의 결합이다. 사소한 생활 속의 따듯한 휴머니즘과 삶의 근본적인 허무주의가 시의 틀 속에서 행복하게 동거하고 있다. 긴 방황의 편력 시대도 종지부를 찍고 이제 그의 시는 갈등보다는 화해를, 분노보다는 용서를 주로 노래한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홀로 있는 먼 산처럼 은은하고 편안한 배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응백(문학평론가)
* 2003년 11월 20일 초판 발행
* ISBN 89-8281-764-6 02810
* 사륙판 변형/120쪽/값 5,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황문정(927-6790, 내선 213,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