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예쁜 크레파스로 그린 희지의 마음 속 일기
남의 일기장을 들추어보는 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가끔은 우리 아이의 일기장을 넘겨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아이가 하루 동안 바라보고 부딪치고 생각하고 꿈꾸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키득키득 웃다가도, 곧 이렇게 속 깊은 생각도 하는구나 싶어 깜짝 놀라게 됩니다.
『할머니 뱃속의 크레파스』는 희지가 알록달록 크레파스로 꼬물꼬물 그려 낸 그림일기 같은 책입니다. 서울로 이사 와서 할머니와 둘이 살게 되면서 겪는 일상 속 이런저런 사건들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신나는 일이 있으면 랄랄라, 화나는 일이 있으면 투덜투덜, 희지의 속마음은 마치 크레파스처럼 여러 가지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아픈 엄마가 치료 때문에 외국에 가고 해군인 아빠마저 훈련으로 떠나게 되자, 희지는 바닷가 마을에서 서울로 이사 와 낯선 환경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이 갑작스런 변화를 희지가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스럽지만 희지는 변함없이 씩씩하고 명랑합니다.
미술 시간에 희지는 그리고 싶은 색깔로 그림을 그립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빨간 노을이 내려앉아 해바라기 얼굴이 붉게 물든 것도 모르고 빨간색 해바라기는 없다고 하십니다. 해군인 아빠가 바닷바람에 그을려 얼굴이 시커멓게 탄 것도 모르고 고동색 아빠 얼굴은 틀렸다고 하십니다. 희지는 정말 답답합니다. 선생님이 밉기도 하고요.
희지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겪는 갈등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과연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저학년 아이들 또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던 가정이나 유치원을 떠나, 처음으로 새로운 규범과 맞닥뜨리면서 마음에 품었던 의문들에 대해 희지를 따라가며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가게 되지요. 또래 친구인 희지가 학교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곧 우리 아이들이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말썽꾸러기이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희지가 자신을 둘러싼 변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일상 속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저장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닫는지 따라가 보세요.
변함없이 따뜻하고 정겨운 이름, 할머니
치매가 어느 순간 가장 심각한 노인병이자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면서, 치매 노인을 다룬 이야기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또 치매 노인이 있는 가정 문제를 다룬 동화도 여러 편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화들은 대개 치매가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 심각성만을 부각시키다 보니 자칫 치매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상관없는 무섭고 특수한 질병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뱃속의 크레파스』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희지의 시선을 따라 할머니의 낯선 모습들을 묘사하면서, 그 눈높이에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판단하게 합니다. 주인공과 함께 할머니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치매 노인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하지만 여전히 희지를 따듯하게 보듬어 주는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섭고 싫은 존재가 아닌, 아낌없는 보살핌과 사랑을 베풀어 주는 따뜻한 이름으로 할머니를 기억할 것입니다.
요란스런 사건도, 그렇다고 딱딱한 교훈조의 대화도 없이, 그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조용히 곁을 지키며 희지 편이 되어 주는 할머니와, 아픈 할머니의 변화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할머니를 감싸고 지켜주려는 기특한 꼬마 손자 희지. 이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나날을 통해, 우리는 가족이란 이름이 전하는 소중한 사랑과 그 사랑을 만드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글쓴이 이종은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6학년이 될 무렵에 서울로 전학을 왔습니다. 떠나온 산골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시설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고 있어요. 가슴 속 산골을 들여다보며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습니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에 동화 『솔지』가 뽑히면서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린이 손희영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지금은 일러스트와 그래픽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아기자기한 일상을 잘 살려 낸 그림으로 여러 친구들을 찾아갈 것입니다.
『일석이조 3학년 전래동화』에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