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서른 살이 된다구. 그거 알아? 서른이 넘은 여자가 남자를 찾는 건 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거 말이야.”
운명의 숫자 23, 그 23을 갖고 있는 남자를 찾아다니던 천방지축, 마음 여린 스물아홉의 아가씨 파니가 있다. 친구 오르페오(사기꾼(?) 동성애자인 이 흑인 주술사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는지는 영화를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의 말에 따라 남자의 사진을 태워 그 재를 마시며 자신을 배반한 그를 저주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모임"의 과정에 따라 손수 만든 관에 들어가 잠을(죽음을?) 기다리는 늘 침울한 얼굴의(그러나 사랑스럽기만 한) 공항 검색원 아가씨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도 입고 싶어했던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파니가 마련해준 금덩어리를 안은 채 파니의 관에 누워 자신의 별로 돌아간 오르페오와 영화 전편에 흐르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소설집 『나 이뻐?』는 바로 그 <파니 핑크(원제: Keiner liebt mich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를 만든 감독이자 작가인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이다. 이미 독일과 유럽에서는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내놓은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는 처음이지만 그의 짧은 소설 한 편을 다 읽기도 전에 우리는 벌써 그의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마법을 걸던 파니(도리스 되리), 이제 우리의 삶에 마술을 건다
도리스 되리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지리멸렬하고 보잘것없고, 하찮게만 느껴지는 하루하루...... 그러나 그는 이 단조로운 일상의 면면을 단순히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비극성, 일상적인 광기를 펼쳐 보인다. 매일 똑같은 하루, 하지만 시시각각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면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꾸는 우리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려 보이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안에서 그는 웃음을 이끌어낸다.
도시의 중산층 지식인 부부, 말로는 소외받는 이방인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그게 지식인의 의무가 아니겠냐고(노블레스 오블리주?) 교양을 가장하며 말하던 부부는 어느새 동네의 베트남 가족이 자신들을 찾아올까 두려워 집에 없는 척, 불도 켜지 않은 채 목소리를 죽여 말하며 식사를 하고(「훙 부인에게 새 신을」) , 불같은 감정에 휩싸여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던 여자는 어느 날, 자신에게(자신의 몸에) 집착하는 남편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의 그것(!)을 잘라 밀밭에 던져버린다. 「신부」의 여주인공은 현재와는 ´다른 삶´, 거칠고 극단적이고 예견하기 어려운 삶을 기대했지만 권태와 슬픔과 반항심이 뒤섞인 감정은 그녀의 인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오른쪽 위에는 해」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바비 인형의 분홍색 하이힐만 가지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나 허망하게 깨져버린다. 주먹코를 아폴로의 코로 바꿔도(「원더나이프」), 헤어 스타일을 바꿔도(「저 세상」) 삶은 결코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론 체중을 줄여 날씬한 몸매를 갖거나(「캐시미어」), 원하는 선글라스를 손에 넣음으로써(「나 이뻐?」) 자신이 ´다른 삶´,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비사회의 허위의식에 근거한 그런 믿음은 진짜인가? 그런 변화는 진실로 ´다른 삶´을 의미하는 것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달리 살 수 있다 호언하면서 나온 배를 두 손으로 가리는 초로의 여인에게서 우리는 그런 믿음이 언젠가는 깨질 것임을 예감한다(「나 이뻐?」).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세 가지 물건을 훔쳤다. 여덟 살 때 바비 인형의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훔쳤고, 열여덟 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만든 특이한 공예품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스물세 살 때, 나는 한 남자를 훔쳤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오른쪽 위에는 해」 중에서
사랑에 대한 동경,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줄 누군가에 대한 동경(「캐시미어」) 역시 ´다른 삶´에 대한 소망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감정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언젠가 만나리라는 희망은(「쉭세」) 트뤼플 버섯을 찾는 암퇘지의 헛수고로 끝나기 십상이다(「감각의 제국」). 더욱이 겨우 찾았다 싶은 사랑은 실망과 회의로 얼룩지고(「쉭세」 「월요일의 호밀빵」 「원더나이프」), 사랑과 더불어 작은 눈덩이처럼 시작된 결혼 생활은 온갖 진부함과 싸움과 의혹과 더불어 점점 커지고 종내는 아주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모든 것을 깔아뭉갠다(「만나」). 사랑은 늙음과 마찬가지로(「누구세요?」 「감각의 제국」) 무상함의 동의어인 것이다. 삶의 무상함과 허망함, 그 비극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의 바다로 치닫거나(「나 이뻐?」) 거리 두기라는 줄타기를 하며 무감함 내지 황폐함에 젖어드는(「꿀」) 방도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내가 뉴욕을 떠난 것은 이십 년 전이었다. 친구 베스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다. 베스는 정확히 새천년이 되는 바로 그 시각, 창에서 몸을 던졌다. 그날 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그녀는 마흔 살이었고, 우리는 동갑이었다.--「월요일의 호밀빵」 중에서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예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 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에요.--「꿀」 중에서
물론 웃음은 실존적 비극성을 결코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웃음이 유발한 이완과 거리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그 비극성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완과 거리가 자아내는 아름다움도 만끽하게 된다. 되리의 소설들에서 그 아름다움은 다분히 작가 특유의 문체에 근거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영화문체(Cinematographic)´라 이름 붙인 독특한 글쓰기, 지극히 간결하고 암시적이며 시각적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는 글쓰기는 삶의 희비극성을 실제의 삶보다 아름답게, 따라서 훨씬 더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표현해낸다.
이 새로운 소설에서 도리스 되리가 펼쳐 보이는 기묘하게 얽힌 우리 일상의 여러 단면들, 지나치리만큼 일상적인(?) 광기를 함께 폭발시켜보는 것은 어떨지......
일상이라는 공포, 그 앞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인생들 도리스 되리가 이야기하는 열일곱 편의 색깔 있는 드라마
도리스 되리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해, 슬픔에 대해, 그리고 치명적일 만큼 슬프고 우울하며, 환멸을 느끼게 하는 극악한 인생에 대해……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도리스 되리의 단편들은 지리멸렬한 삶에서 나온 일상의 화려한 요지경을 보여준다.
Norddeutscher Rundfunk
도리스 되리는 독단적이지 않으면서도 매우 입체적인 서술방식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Der Kurier
어디에서 읽어도 상관없다. 욕조 안에서든, 차 안에서든, 소파에 파묻혀서든…… 중요한 건 단지 그녀를 읽는다는 것이다. Deutschelandfunk, Koeln
도리스 되리는 이 끔찍하고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결정적인 삶의 어느 순간, 광대의 방울소리와도 같은 휴먼코미디를 선보인다. Die Presse, Berlin
아무 의미도 없어져버린 현대인의 아이덴티티. 방향을 잃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도리스 되리는 정확한 몸의 언어로 풀어낸다. Der Spiegel
도리스 되리 Doris Doerrie
1955년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연기와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고 1975년 독일로 돌아와 뮌헨의 영화 텔레비전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바이에른 방송과 국영 제2방송(ZDF)에서 다수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아동영화를 만들었다. 1983년 「마음 한가운데로Mitten ins Herz」를 발표하여 영화감독으로 첫 발을 내디딘 그녀는 국내에도 많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는 「파니 핑크(원제: Keiner liebt mich)」를 비롯하여 「고래 뱃속에서Im Innern des Wals」 「나 이뻐? Bin ich schoen?」 등 다수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소설집 『사랑, 고통 그리고 그 모든 빌어먹을 것들 Liebe, Schmerz und das ganze verdammte Zeug』(1987)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소설집 『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Was wollen Sie von mir?』(1989), 『내가 꿈꾸었던 남자Der Mann meiner Tr ume』(1991), 『영원토록Fuer immer und ewig』(1991), 『잠자라Samsara』(1996), 장편소설 『우리 이제 뭘 할까?Was machen wir jetzt?』(2000), 『푸른 드레스Das blaue Kleid』(2002) 등을 펴냈다. 문학과 영화 분야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에른스트 호프리히터 문학상과 몽블랑 문학상, 베티나 폰 아르님 문학상, 바이에른 영화상, 독일 펜 예술상, 독일 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독일 비디오 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 <파니 핑크>의 원작자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 『나 이뻐?』
자신의 삶에 마법을 걸던 파니(도리스 되리), 이제 우리의 삶에 마술을 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세 가지 물건을 훔쳤다. 여덟 살 때 바비 인형의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훔쳤고, 열여덟 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만든 특이한 공예품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스물세 살 때, 나는 한 남자를 훔쳤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오른쪽 위에는 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