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문학 인생 삼십 년, 그리고 『더러운 책상』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등단한 지 삼십 년, 그간의 박범신 문학을 정리하는 새 장편이 출간되었다. 1999년 『침묵의 집』 이후 사 년 만에 출간되는 이 작품을 두고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예술의 기원에 대한 소설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 문학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소설"이라고 평하고 있다.
예인(藝人)이라 불리고 싶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한 순수한 영혼의 성장기인 이 소설은 어느 날 새벽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이다. 무엇이 그리운지 알지 못하면서, 그러나 무엇인가 지독하게 그리워서 나날이 흐릿하게 흘러가던, 그런 날의 어느 새벽이었을 것이다.
그 새벽으로부터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무엇인가 지독하게 그리워서 나날이 흐릿하게 흘러가던, 그런 날의 어느 새벽", 그 새벽은 어쩌면 작가의 새벽인 동시에 젊은 날의 우리 모두의 새벽일 터.
현재 쉰여섯 살의 내가, 열여섯, 열일곱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 의 나인 그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나에 대해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는, 사춘기 시절의 그(곧 어린 시절의 나)의 고민과 방황 등이 현재 쉰여섯 살의 나와 계속해서 교차되어 서술되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그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나 그의 행동의 저변에는 늘 냉소적이고 어두웠던, 삶에 대해 늘 회의적이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했던 그의 모습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아니 쉰여섯의 나는 열여섯의 그에 대해 지극히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두세 페이지에 걸치는 짧은 단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각 단장의 제목들만 보아도 이 소설을, 혹은 박범신 문학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함석대문, 신문지로 된 산의, 들길에서 철길까지, 늙지 않는 짐승이 그에게 깃들여 있네, 부러진 가위, 위기의 사랑스런 휴식 상태에 있는 대담성 혹은 살인, 추락, 눈물겨운 내 사랑, 부부, 1963, 열여섯 살, 쇼펜하우어, 정적, 범죄의 길에 인도되는 어린 영혼에게, 영원으로 가려고 나는 한때 화류항으로 흘렀네, 유랑, 육체와 영혼, 투신, 이중성, 단백질의 시체들이 자란다, 요추골다공증, 매화당, 어머니, 도스토예프스키, 희망에게, 상실, 앞날의 모든 길이 시작되는 길, 거울, 극락정토 부용미용실, 나자로여 너는 잠자고 있는가, 앙리 미쇼와 박재삼, 1964 11 19 흐림, 묘지, 유리도시, 죄와 벌, 눈물, 후일담 또는 사족, 암살, 샘터에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결별, 대학, 열아홉 살, 앙트완 로캉탱 삼십 세, 눈을 감는 거야, 라일락꽃 그늘, 살인, 틈, 장마, 여심여인숙, 아사餓死,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참을 수 없는 풍뎅이처럼 부푼 것들, 공포, 내 책상, 가난의 고통은 싸는 것이다, 혁명, 임화 1908 1953, 「현해탄」과 낭만주의, 독살, 해수海獸 오장환, 매음녀는 나의 소매에 달리어 있다, 수평이동, 엽기, 풀잎처럼 눕다, 살인자, 우주에서 늑대들이 울부짖는다, 한터산방, 관뚜껑, The Last Train
이런 모든 것들이 현재의 박범신을 만들고, 박범신 문학을 만든 키워드는 아닐는지……
이 단장의 형식에 대해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주제와 함께 발생하는 삶을 말하려 할 때 단장의 형식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들린 사람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탄생과 소멸을, 그리고 소생을 또렷한 의식으로 고찰하고 있"으며, 단장의 형식은 "하나의 주제를 그 빛이 가장 강렬한 순간에 포착하고 드러내는 글쓰기"라는 것이다.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네 해에 걸친 그의 삶은 순간순간이 주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구슬을 명주실에 꿰듯이 박범신은 "어떤 관념들이 차례차례 그의 육체의 의지로 화신하는 순간들을 꿰뚫으"려 했다는 것이다.
예인(藝人) 박범신은 작품의 말미에 길지 않게 덧붙인다.
나는 작가보다 예인(藝人)이라 불릴 때가 훨씬 좋다. 이 소설은 예인이라 불리고 싶은 내게 아주 특별하다. 내가 평생 가장 사랑했고, 평생 가장 증오했던, 그의 젊은 목숨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는다. 결코 늙지 않는 짐승이 그에게 깃들여 있으므로, 우주에서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예민하게 수신하면서, 그 끔찍한 상처의 내벽을 따라 오늘도 그는 영원으로 가려고 화류항 젖은 길을 끝없이 흐른다. 불과 열여섯 살의 그가 너무도 또렷이 보았던 것처럼 세계는 지금 광기에 휩싸여 있다. 부디 그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여주길. 당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늙지 않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주길.
--작가의 말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극복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한 청년은 죽은 시인의 이름으로 반항의 형이상학이 된다.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은 그 죽은 시인에 대한 고찰이다.(황현산, 문학평론가) 이제 그의, 한 예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차례이다.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은 한 순수한 영혼의 성장기이다. 타락한 이곳을 낙원이라 일컫고 이곳에서의 더럽혀진 삶을 행복이라 칭하는 위선의 세상에서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피 같은 단 한 편의 작품. 이 단 한 편의 작품을 위해 주인공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어떤 모험도 마다 않는다. 이 모험 속에서 주인공은 타인을 혹독한 시련 속에 밀어넣는 악마가 되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버림받은 존재들에게서 위대한 예술혼을 발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더러운 책상』은 단순한 성장기를 넘어선다. 이 위험천만한 성장기에는, 거짓된 세계에서는 모든 행복이 거짓이며 진정한 의미는 이 세계가 폐기 처분한 어떤 곳에 깃들여 있다는 모더니티의 역설이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더러운 책상』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예술의 기원에 대한 소설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 문학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더러운 책상』과 더불어 오랜 시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또하나의 빛나는 성장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
박범신 문학 인생 삼십 년의 결정(結晶) 『더러운 책상』
박범신의 『더러운 책상』은 한 순수한 영혼의 성장기이다. 『더러운 책상』은 하나의 위대한 예술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그리고 예술의 기원에 대한 소설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 문학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더러운 책상』과 더불어 오랜 시간 후에도 지워지지 않을 또하나의 빛나는 성장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