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중견 소설가 박범신이 등단 30주년을 맞아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를 펴냈다. 소설가란 이름으로 산 지 삼십 년…… 시집을 엮는 건 처음이다. 절필을 선언하고 삼 년간 용인의 한터산방(山房)에 머무르면서 시를 썼다는 작가는, 시집을 엮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 나이 이립(而立)의 서른을 자축하며, 더도 말고 오늘 하루, 나의 시인이 갑옷을 뚫고 나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얼쑤절쑤 춤 한번 추고 가는 것,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지요.(自序 중에서)
그런 만큼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시들로 가득하다. 등단 동기인 김승희 시인은 발문에서 짧고도 간결한 그의 시를 일컬어, "불과 몇 행 안 되는 짧은 시에 아주 넓고도 높고도 깊은 것들을 한 방으로 응축해놓고 있"다며, 시인다운 강렬한 압축을 상찬했다.
우리집 젊은 진돗개는 어쩌다 목줄 풀어주면 아주 미친다 나는 너무 반듯하다 사랑하는 그 누구도 나의 목줄을 풀어주는 일 없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아주 미친다 - - 「작가」 전문
또한 도시생활에서 상실한 농경적 모태로 회귀하며 그의 시집에서는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 숲이 작가의 마음에 들어앉기도 하고 햇빛 사이로 딱따구리가 울기도 하고 천명에 기대어 나팔꽃이 꽃대를 올린다. 꽃, 달팽이에게, 뽕나무, 빈대, 산에게, 용인 굴암산, 산벚꽃 지는 날…… 제목만 보아도 시가 씌어진 한터산방이 눈에 보일 듯하다. 절필을 하고 시를 얻는 동안 그는 인위를 버린 자의 행복과 지복에 다가갔었던가.
절을 떠나니 편안해졌다 편안하니 부처가 중심으로 들어왔다 한밤중 홀로 거울을 보니 내 사랑 이제 환하구나 - - 「절필」 전문
한편 시집에는 「불의 나라」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흰 소가 끄는 수레」 등 자신의 소설 제목과 동일한 시편이 실려 있어 주목된다. 자기 소설을 자기 반영적으로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소설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새롭게 펼쳐진다.
작가 나이 이립의 서른…… 전사의 갑옷에 오랫동안 눌려 있던 작가의 시인이 드디어 시의 옷을 입었다. 그의 시는 세월의 스침에 순한 바람 소리로 화답하며(김명인), 밝은 어둠과 어두운 광채를 둥근 시선으로 바라본다(이경자). 등단 동기인 정호승 시인의 말대로, 그는 이미 시의 비밀을 아는 소설가요, 풀잎처럼 누워 시를 쓰던 시인이다.
*2003년 4월 15일 발행
*ISBN 89-8281-642-9 02810
*128*188/120쪽/값 6,500원
*담당편집: 장한맘(927-6790, 내선 202)
자서
오늘 하루
작가라는 이름의 운명으로 산 지 올해 딱 삼십 년째입니다. 아시다시피 산문은 촘촘한 논리의 그물망에 포위되어 있지요. 나의 시인은 그래서 전사의 갑옷에 횡경막이 눌려 오랫동안 술도 제대로 못 쉬고 지냈습니다. 이제 부끄럽지만 작가 나이 이립(而立)의 서른을 자축하며, 더도 말고 오늘 하루, 나의 시인이 갑옷을 뚫고 나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얼쑤절쑤 춤 한 번 추고 가는 것,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지요. 햇빛도 청량하고 깊은 봄인 걸요.
-북악 아래에서, 2003년 봄 박범신
박범신 형은 이미 시의 비밀을 아는 소설가다. 그는 일찍이 풀잎처럼 누워 시를 쓰던 시인이었다. 이 시집 속에는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먼 길을 가는 작가 박범신이 있고, 향기로운 우물을 깊게 깊게 파는 시인 박범신도 있다. - - 정호승(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