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잊혀질 어느 오후……
1996년 장편 『오렌지』로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 정정희가 첫 소설집 『널 사랑하게 해봐』를 선보인다. 등단 칠 년,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말장난에 가까운 참신한 비유와 감각적 언어로 깃털처럼 부박한 젊음의 풍속도를 그려냈던 작가의 작품들은 그 시간만큼 더욱 깊어져 있다. 생의 순간순간이 곧 잊혀질 어느 오후의 한순간인 일상의 면면을 그는 가볍고 경쾌하게, 동시에 고요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다.
정정희의 소설은 일상의 밑바닥에 고여 있는 권태와 고독을 경쾌하게 묘사한다. 그의 소설인물들은 상실과 결핍, 망각과 고립을 삶의 숙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자들이다. 이들에게 삶이란 곧 잊혀질 어느 오후의 한순간처럼 고요하고 무의미하다. 가족과 연인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반복적인 일과는 이들에게 견딜 수 없이 지루하고 기만적인 무언극일 따름이다. 세계와 사물을 향한 무기력과 불신의 태도 속에는 희망으로 포장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냉소조차도 허위적인 정열로 간주하는 이들의 무심한 몸짓은 인생의 잔혹한 본질에 대한 역설적인 비유로 읽힌다. 백지연(문학평론가)
널 사랑하도록 만들어봐. 날 일어나게 해봐. 날 걸어다니게 해봐. 날 뛰게 해봐.
이번 작품집에서, 정정희는 장편에서 보여주지 않은 숨어 있던 내면을 무심하게 드러낸다. 젊고 발랄한 감각의 신세대 소설 같은 느낌을 주었던 장편들과 달리 단편들 안에서 그는 더욱 성숙해지고 깊어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인물들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동요하고 주저하며 소통되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치료 없는 우울증, 처참한 가족 풍경들, 분리불안에 시달리고, 연루불안에 시달리고, 사산하고, 사별하고, 우울증에 괴로워하고, 자학하고, 자살하는 가족과 연인들의 이야기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정희 소설의 사회적인 발언이 시작되고 있다고 본다. "미루어보건대 정정희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신경증과 우울증의 병인 가장 멀리에 해체되어가는, 혹은 이미 해체가 완료된 가족을 배치해놓았기 때문이다.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경과해왔지만 정정희적 인물들의 최종적 병인은 현대사회"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이 지적한 대로 정정희의 주인공들은 늘 불안하다. 분리불안에 시달리고, 연루불안에 괴로워한다. 그들은(혹은 우리는) 서로 헤어져 있음으로, 또 함께 있음으로 해서 불안하고 힘겹다.
취재차 중국으로 떠난, 사라져버린 아내를 기다리는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기면」의 나가 그렇고,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늘 애인을, 남편을 기다리는 「공룡」의 나가 그렇고, 서로에게 안주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그와 그녀가 그렇다.(「봄밤의 일」) 「지하철에서 그녀가 음악을 듣고 있었을 때」의 한 남자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모르는 여자의 허벅지를 깨물고, 「전화의 저편」의 주인공은 죽고 없는 남자와 밤마다 통화를 한다.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해주던 아버지가 죽은 후 누나(「누나」)는 달려오는 택시에 몸을 던지고, 사고로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는 각각, 잠으로, 술로 그 슬픔을 달랜다. 물론 두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스카이 블루 핑크」)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모텔을 운영하며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나의 목을 조르고 만다.
이렇듯 정정희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흔들리고 불안하고, 생이 힘겨워 오히려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지만, 그의 인물들은 곧 우리의 모습에 다름아니기에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작중인물들과 독자인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하여, "날 일어나게 해보라는, 걸어가게 해보라는, 뛰게 해보라는" 작중인물(「공룡」)의 한마디는 결국 독자인 우리를 향한 것일지도......
정정희는 탁월한 심리학자일 뿐 아니라 사회학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병리적인 사실과 사회적 사실들을 드러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배치해 소설을 만들어낼 줄 아는 많지 않은 작가들 중 하나이다. 바로 이 작가로 하여 우리는 이제 어느 날 텅 빈 지하철에서 누군가 느닷없이 자신의 허벅지를 허기진 듯 물어뜯더라도 그의 기나긴 사후애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김형중(문학평론가)
수록작품 |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기면」 「공룡」 「자두잼」 「곧 잊혀질 어느 오후」 「지하철에서 그녀가 음악을 듣고 있었을 때」 「봄밤의 일」 「전화의 저편」 「누나」 「스카이 블루 핑크」 「모텔 마릴린」 「벤자민」 「부드러움이 주는 교훈」 「나비부인들」
* ISBN 89-8281-656-9 03810
* 신국판 | 328쪽 | 값 8,500원
* 초판 발행일 | 2002년 4월 7일
널 사랑하도록 만들어봐. 날 일어나게 해봐.
날 걸어다니게 해봐. 날 뛰게 해봐.